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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은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초 일찍부터 친분을 가져왔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조종대(趙鍾大)로부터 동단의 설립취지를 듣고 이에 찬동하여 그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했다.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支團)을 설치했는데, 양양군단은 이러한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산하조직이었다.동단에서는 주로 임시정부의 선전 및 재정자금의 모집,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던 임시정부 지원단체였다.양양군단 결성 직후 그는 김형석(金亨錫)을 비롯해 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 등을 동단에 가입케 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그런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동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붙잡혀 10년의 중노동형을 언도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