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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계출 신라 경명대왕자 밀성대군 언침 기래 수원 좌복야공 언 19세손 이락당공 18세손야. 박재호선생은 청사에 빛나는 독립투사요 민중운동의 선구자이시다. 선생은 1896년 1월 21일 옥천군 청성면 소서리에서 부친 밀양박씨 수보공과 모친 연일정씨의 차남으로 탄생하셨다. 선생은 남달리 총명하여 소년기에 벌써 경사에 통달하셨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요되고 일제의 압박이 나날이 심해져 국운은 백척간두에 서있었으니 구국일념의 선생이 어찌 좌시할 수 있었으리요. 1915년부터 항일운동에 나설것을 결심하고 같은 마을의 박동의 안동하 전복? 동지들과 자주 모여 모의하셨다. 1919년 3월 1일 43세 선생은 동지들과 상경하여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식과 시위운동에 참가한후 향리에서 거사할것을 결심하고 동지들과 함께 극비리에 태극기를 제작 가가호호에 배부하면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나설것을 호소하였다. 때는 3월 3일 청산장날을 기해 운집한 300여 군중의 선봉이 된 선생은 청산주재 일본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 소장 지?및 헌병들과 맨손으로 싸우다 피체되었으며 일 헌병의 발포로 5명이 죽고 56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새은 문초과정에서 자신이 주동인물을 자처하여 동료들을 모두 석방케 하였으니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본받지 않을 수 있으리오.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셨다. 출옥하신후 향리에서 한학서당을 개설하여 청소년들의 인격도아와 독립정신고취에 힘쓰시다가 1944년 9월 16일 해방의 감격도 누리지 못하시고 68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선생의 후?는 아직 세상에 널리 현창되지않았으나 선생의 줄기찬 애국충정과 빛나는 투쟁업적은 역사에 길이 길이 빛나리라. 1983년 8월 15일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88년 11월 30일 국가 보훈처와 충청북도의 지원등으로 공적비를 세우고 광복회 충북지회장(송선호)이 비문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