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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동에 붙어있는 안병하홀, 차규식홀의 이름이 매우 잘 보인다. 앞은 안내해 주시는 고영찬님 이번 탐방이 있기 전까지는 이 두 분을 몰랐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안병하 경무국장은 5·18 당시 전남 지역의 치안 총책임자인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다. 당시에 그는 신군부로부터 경찰만으로는 치안 유지가 어려우므로 군 병력 투입을 요청하라는 강요와 협박을 받았지만 군이 투입될 경우 시민들을 자극하여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신군부의 명령을 끝내 거부하였고, 오히려 “상대는 우리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시민인데 경찰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느냐”며 경찰이 소지한 무기를 회수하였다. 경찰봉만 소지했던 당시 경찰은 그 후 계엄군에 의해 부상당한 시민들의 치료는 물론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주고, 옷도 갈아입히는 등 시민들에게 편의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5·18 항쟁 전후 광주 시민들은 시위 중 경찰서 부근을 지날 때면 “경찰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민주경찰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 신군부 강경진압 명령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5월26일 직위해제 당한 그는 보안사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10여일의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그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1988년 10월10일 광주의 한을 품은 채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