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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로 왜적과 그 주구들이 온갖 위협과 회유로 선생을 포섭하려다가 그것이 도저히 안될 줄 알고는 백여 왜병으로 대술면 한곡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납치하여 죽음과 굴종의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대사한 끝에 드디어 우해하였다. 이때 선생을 모시고 가던 장남과 하인이 동시각에 모두 적의 흉도 아래 병사하였다. 이것이 1907년 9월 26일 아산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였다. 선생의 장남은 휘가 충구이고 호는 유재이다. 그는 일찍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다른 부형을 받들면서 자재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관도의 진출에 급급할 수 없었다. 수당 선생이 공주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왜의 관헌이 장남인 유재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민종식의 소재를 알리라고 했지만 유재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수당 선생에 대한 적의 감시가 날로 위험의 의도를 더해가자 유재는 소심 익익성효를 다하면서 곁을 떠나지 않더니 필경 평촌 냇가에서의 참하를 당하였다. 적의 칼날이 부친의 신상에 범하려하자 유재는 몸으로 가로 막았고 다시 그 위를 하인 김응길이 덮어으나 결국 차례로 적의 잔인한 손에 희생되었다. 아아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며 하인은 상전을 위해 죽었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죽음이여 충과 효와 의의 권화인 그 죽음들이며. 이러한 가문에서 자 흥손은 그 통한이 어떠했을까 유재의 장남이요 수당의 장손인 휘 승복은 호가 평주이다. 겨우 13세에 ○극의 화를 입은 그는 일찍부터 국가와 부조의 원수를 갚을는 강한 의지를 품었다. 서울로 올라가 상동청년학원 휘문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육을 받은 다음 약관의 나이에 로서아로 나가 보재 이상설 석오 이동녕의 밑에서 광복을 도모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연통제 비밀조직에 가담하였다. 29세에 귀국한 뒤 언론계에 투신하여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거쳐 월남 이상재 주재하의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취임하여 안재홍 한기악 이관구 등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한편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를 발기한 주역의 일원으로 홍명희와 함께 강령과 규약을 만들고 선전부 총무 간사로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1945년 3월에 예비검속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8.15해방과 함께 자유를 찾아 다시 건국사업에 분주한 평주는 조선국민당 한국독립당 등 정당의 주요직책을 맡기도 했으나 민족분단과 사회혼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호연히 이곳 향리로 돌아왔다. 6.25동란 중에 해병장교인 장남 장원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원산에서 전사하자 더울 세상에 뜻을 잃고 오직 선사에 유의하여 수당집을 발간하고 한곡에 있는 수당 유재의 묘역을 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