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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을 맞은 이 땅은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마침내 6.25 사변이 발발하여 우리 고장도 50년 6월에는 인공치하에 들어갔다. 고 남궁견은 1928년 12월 19일 부여읍 석목리 301번지에서 남궁창준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1946년 10월 20일 부여초급중학교에 입학하여 50년 6월에는 부여중학교 5학년(현 고2) 재학생으로 학도호국단 연대장의 소임을 수행하던 중 그 해 6월에 피체수감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9월 25일 대전형무소(교도소)에서 무참히 희생되었으니 향년 23세다. 고 최영규는 1929년 5월 15일 목천면 가신리 398번지에서 최만석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영특하였으며 1946년 10월 20일 부여초급중학교에 입학하여 체육에 기량이 뛰어나 체육부장을 역임하였으며 50년 8월 31일 바로 이 교정에 끌려와 혹독한 폭행을 당하고 고진하여 왕포천가에서 쓰러져 희생되었으니 향년 22세다. 호라 민족적 비극의 과중에서 겨우 약관을 지나 봉오리채 꺽인 두 학우의 원통함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이제 늦게나마 옛벗들이 모교 교정의 작은 돌에 당시의 정황과 한을 새겨 두 학우의 고혼을 달래고 유덕을 천추에 기리노니 원혼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서기 1990년 9월 28일 부일회(부고일회)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