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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및 사건 한국전쟁 당시의 대전교도소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자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 한국정부에 의한 희생자(산내 곤룡골) : 6.25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여순사건 관련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한국정부의 지사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국민보도연뱅은 1949년 6월 5일에 좌익계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로 보호, 관리하려는 취지로 결성된 단체로, 흔히 보도연맹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체포 또는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의 심사와 분류에 의해 'A, B,C' 또는 '갑, 을, 병'으로 나뉘어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A'와 '갑' 등그은 대전 인근 산내에서 대전형무소 일부 수용자들과 함께 모두 학살되었으며 그 수가 수 천에 이른다고 한다. □ 북한군에 의한 희생자 :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군은 급히 퇴각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대전교화소(대전형무소), 충남도정치보위부(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내무서(대전경찰서) 등지에 수감되어 있었던 정치범(우익인사)들을 대전형무소 내 우물에 생매장을 하거나 대전형무소 후문 북쪽 온상의 밭고랑, 용두산, 도마리, 탄방리 등으로 끌고 가 학살하였으며, 그 희생자가 1557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 대전형무소 의무과장 안사영 : 안사영은 공주 영명학원을 수료하고 1917년 세브란스 연합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의 의무감과 신흥중학 산하 산제병원의 원장을 역임한다. 이후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에 몇 차례 체포와 투옥을 당하다가 결국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평양에서 2년간의 복역을 하고, 1922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되돌아간다. 1940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안동병원을 차리고 독립군 치료와 독립군자금모금에 전념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대전형무소 형무의무관으로 임용(1946년)되어 1962년 4월 23일까지 근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