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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은 발발하였다. 압도적인 병력과 소련제 최신 전차로 무장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수도 서울이 사흘만에 함락되었다. UN은 즉각 파병을 결정(6월28일)하였고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지상군파병(6월 30일)을 승인하였다. 이에 당시 일본 큐슈에 주둔하던 제24사단 병력이 우선 투입되었으며, 7월 5일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 스미스 특임대대가 최초로 교전하였으나, 400여명의 인원중 150여명이 인명피해를 입고 천안방면으로 후퇴하였다.이에 미 제24사단은 34연대를 천안방면에 배치하여 방어하였으나 연대장(로버트 R.마틴대령)이 전사하는등 35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고 공주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미 제24사단은 재차 21연대를 투입하여 7월 9일부터 3일동안 지금의 세종시 개미고개 일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500여명이 희생되었고, 대평리로 철수하여 공주와 대평리를 잇는 금강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마저도 3일만에 붕괴되어 7월 14일에는 대전으로 철수하였다. 북한은 대전을 탈취 후 경부축선을 주공으로 남한을 단기간에 점령하기 위해 제3, 제4 보병사단과 제105전차사단으로 편성된 막강전력의 제1군단을 투입하였고, 미 제24사단은 7월 20일까지 대전을 방어하라는 미8군사령관(월튼 H.워커중장)의 요구에 따라 결사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였다. 마침내 북한군은 대전 외곽을 완전차단하고 7월 20일 새벽부터 총공세를 퍼부었다. 북한군 제4사단에 이어 제3사단이 대전 시내로 진입하였으며, 미군의 3.5인치 로켓포조는 대전 시내에 출현한 소련제T-34전차 14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통신이 두절되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사단장(월리엄 F.딘 소장)은 철수명령을 내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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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18시가 지나면서 철수가 시작되었으나 이미 퇴로가 차단된 뒤였다. 미 제24사단은 4천여명의 참전자 중 약1천여명의 인명피해(전사확인자 818명각인)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쟁 역사상 최초로 전투 중 사단장이 실종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하지만 대전지구전투는 스미스 특임부대가 7월 5일 오산에 투입되어 전투가 개시된 이래 7월 20일까지 막대한 희생을 치루면서 100여km라는 공간을 내어주었으나, 16일이라는 소중한 시간확보를 통해 국군및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서을 구축 할 수 있게 하였고 향후 인천상륙작전등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승리한 전투였다. 이에 대전지구 전투에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미군참전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대전지구전투를 승리로 이끈 미 제24사단 장병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며 그 공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를 건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