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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김마리아 선생 동상 The Statue of Patriotic Martyr Kim Maria 관리번호 12-1-10 건립자: 김마리아동상건립위원회, 정신여자고등학교동창회, 광산김씨 종친회 대표 김우중 관리자: 순국선열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소재지: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 공원내 20세기 초엽의 여성지도자요, 교육자요, 애국지사이며 돈독한 기독교 신자인 순국열사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소래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학교(소래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철저한 애국애족 정신을 갈고 닦아 한평생 광복 운동을 하였다.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일본에 유학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곧 귀국하여 3.1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때 부녀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중 일경에 체포, 5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전국적 규모로 조직하여 활동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3년 징역형을 받고 재수감되었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사경에 처하자, 스코필드 박사의 주선으로 병 보석을 받고 가료 중 동지들의 도움을 얻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 국민대표회 대표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3년 7월 미국으로 재 망명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 필요한 것은 민족단결과 실력양성이다" 라는 큰 뜻을 품고 파크대학, 시카고대 대학원, 콜럼비아대 대학원, 뉴욕 신학교 등에서 수학하며 1928년 1월 뉴욕에서 근화회를 조직, 항일여성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형기가 만료되어 1932년 7월 귀국하나 일제의 감시와 간섭으로 일반 활동이 금지 되었다. 원산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 교수 및 장로교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 회장 등 종교활동을 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옥고 중에 얻은 고문 후유증 악화로 해방을 17개월 앞둔 1944년 3월 13일 평양에서 53세를 일기로 소천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