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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내용 출처 : 고영철의 역사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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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수산리에서는 5·10 선거를 대비하여 동네 사랑방 등에서 30대에서 5,60대까지의 문맹자들에게 글자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총선거에서는 좌익 계열과 입산자들이 투표장을 습격하여 총기를 발사하여 3명이 희생되었으며 투표장인 향사를 불태워 버려 투표는 무효가 되었다. 1948년 12월에는 해안 마을로 소개되었다가 다음해에는 수산 주민들의 진정에 따라 복구령이 내려 수산1리가 복구되었다.(제주4·3유적Ⅱ에서는 1948년 11월 21일 경 소개되었다가 그 해 12월 1일 경 복귀하였다고 되어 있다.) 민보단을 조직하여 자체 경비를 강화하였으며, 마을 안의 나무는 모두 벌목하고 마을 주위에 높이 3m의 성곽을 쌓았다. 성 밖으로 1.5m의 외성을 쌓아 그 안에는 가시덩굴을 넣어 월성(越城)을 막았다. 성곽에는 3개의 성문을 내어 농사일이나 마을간 통행에 사용했다. 마을 사람들이 외출하려면 민보단장이 발행하는 통행증이 있어야 했다. 성 밖에서 농사일을 하는 농민들은 민보단이 감시 보호했다. 야간에는 민보단원들이 성의 망루에서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그래도 두 차례의 습격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식량, 우마, 옷 등을 탈취당했고 집은 불태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태수습을 위해 1949년 초부터 경찰 1개 소대가 10개월 남짓 주둔하게 되었다. 충남에서 파견된 경찰 소대는 여느 부대와는 달리 민심을 수습해 가면서 청장년들과 힘을 합하여 토벌작전과 방어작전 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소대장 최융양(崔隆陽)은 우선 민가(강승보 댁)를 빌어 본부를 정하고 울담을 3m 높이로 쌓아 민보단 본부까지 겸하였다. 각 분대는 동네별로 여유가 있는 집을 빌어 분견(分遣) 활동을 하였는데 민보단 특공대(특공대라 해도 특수장비로 무장한 것은 아니고 젊고 패기있는 젊은이로 편성)와 합동으로 토벌과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는 데 역점을 두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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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대는 1949년 말에 철수했는데 주둔하고 있는 기간인 1949년 5월 그 공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수산진성 서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 입구 충혼비 옆으로 옮겼다. 그 후 성산포경찰서에서는 수산리에 파출소를 신설하면서 민가에 파출소를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불타버린 향사를 초가로 복원하여 이동하였다. 초대 파출소장 양성만은 원래 성 밖에 살던 사람들이 성안의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하는 것을 안스럽게 생각하여 성곽을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상부에서는 '뜻은 좋으나 너무 힘겨운 일이다'고 하여 만류했으나 강행한 것이다. 청장년은 모두 군에 입대한 때였으므로 노약자와 젊은 여성들의 노력으로 3개월만에 완공해서 셋방살이하던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일로 파출소장은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수산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