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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목마른 잠녀들. 출처 : 제민일보 2007년 7월2일. 발로 딛는 잠녀들의 삶 온평리 ‘해녀공로비’ 온평초등학교와 유독 인연이 깊은 이가 있다. 하도리 출신인 고창호씨(75·전 교장)다. 그는 구좌출신이지만 온평리에 거주하는 건 물론, 정년퇴임하기까지 교사생활 13년을 온평교에서 재직했을 정도다. 고씨는 1954년 온평교에 부임을 한다. 하지만 불타버린 학교는 비가림이 되지 않아 비날씨엔 비가 뚝뚝 떨어지는 걸 감내해야 했다. 특히 그에겐 잠녀들을 교육하는 일이 큰 과제였다. 4·3과 한국전쟁은 잠녀들의 바깥물질을 제한시켰다. 바깥물질은 소득과도 관계되기에 무척 중요했다. 잠녀들이 제주라는 섬을 떠나려면 ‘한글해득’ 도장이 찍힌 양민증을 갖고 있어야 했다. “한글 해득의 희망은 육지로 갈 수 있다는 것과 귀결됐죠. 초등 2년 과정을 이수하면 한글해득 명단에 올려줬어요. 그 때 교육을 받은 60명의 잠녀 가운데 대부분이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어요. 2달 정도면 해득을 하더라고요” 고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열악한 교육여건을 개선시킬 방법이 없었다. 전쟁과 4·3은 제주도의 살림살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학교를 새로 지을 자재를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는 잠녀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된다. “어머니들의 미역바다는 개인들이 입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학교 건립 자금을 만들면 어떨까요” 당시 미역은 돈이 될 때였다. 잠녀들은 만장일치였다. 마을의 허락도 얻어냈다. 마을 전체 총회를 거쳐 온평리와 다른 마을의 경계선을 ‘학교바당’으로 정하게 된다. 잠녀들은 자신이 잡은 미역의 ½을 학교에 냈다. 그런데 미역을 캐는 것만 능사는 아니었다. 소비가 문제였다. 제주도에서 생산된 미역은 도내에서 소비되기보다는 건조과정을 거쳐 대부분 육지부로 나갔기에 그때그때 잡아올린 미역을 소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학교바당에서 건져올린 미역을 제때 소비해야 학교를 세울 기금이 마련됐기에 소비처를 마련하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마침 제1훈련소에서 온평리 미역을 장병들의 부식으로 사용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한 해 미역을 캐면 1개 교실분을 만들 돈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했다. 1·2학년, 3·4학년, 5·6학년의 학생들이 합반을 하던 시절이었다. 잠녀들은 아이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학교바당을 전부 내놓는다. “50%도 포기할테니 학교에서 교실을 하나 더 지어달라”고 원했다. 고창호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때 잠녀들이 아니었으면 학교 설립이나 전기 가설을 하지도 못했죠” 고씨는 마을을 살려낸 잠녀들의 공로를 인정해주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그만큼 가까이에서 잠녀들의 노고를 봐온 사람이다. 그는 그들의 어려움도 안다. “잠녀 일을 기피하는 이유는 밭엘 가면 3만원이라도 받지만, 물질은 종일 하더라도 그만큼 벌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잠녀들은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온평리를 살려낸 일등공신이다. 잠녀들의 노력으로 교실이 만들어지자 도움의 손길이 잇따랐다. 인천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온평 출신들이, 멀리는 재일동포들이 지원을 해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학교는 온평초등학교 개교이후 첫 여성 중학교 입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여성(잠녀)의 노력으로 일군 학교에서 드디어 여성이 교육의 혜택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잠녀들의 활동이 곧바로 인정되진 않았다. 온평초등학교엔 학교 설립 관련 기념비가 4개 있다. 해녀공로비, 공로자기념비, 희사자기념비 2개 등이다. 해녀공로비를 제외한 3개의 비는 단기 4293년(서기 1960년) 온평초등학교 추진위원회 이름으로 세워졌지만, 해녀공로비는 1년 뒤인 1961년 온평초등학교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잠녀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은 뒤에야 ‘해녀공로비’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렇듯 잠녀들은 개개의 가정만을 일으키진 않았다. 온평리처럼 학교를 일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노력해온 역사는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