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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검속 희생자 위령비 건수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적인 침공을고 한 민족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에 휘말렸다. 이날 정부에서는 후방의 민심교란을 우려하여 치안국장의 명의로 전국 경찰에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을 시달하였다. 이것이 바로 비극을 몰고 온 예비검속령이었다. 이 미명아래 제주도 관하 4개 경찰서(제주,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에서는 선량한 공무원, 교사, 보도연맹원, 농민, 학생,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물경 1500여명을 구금하였다. 당시 전황은 악화되어 수도 서울은 북한군에 점령당하고 정부는 대전을 거쳐 8월 18일 부산으로 후퇴하였다. 만일 부산마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 갈 때 제주도로 옮겨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전에 이곳을 반공기지화하여 두려는 무모한 발상에서 무고한 옙검속자를 무참히 학살하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주경찰서 관할 3개읍면(제주읍, 애월면, 조천면)에서 1,000여명이 경찰서 유치장과 산지 (구)주정공장에 분산 구금되었으며 그 해 7월 16일(음 6월 2일)과 8월 4일(음 6월 21)에 알몸차람의 500여명을 배에 태워 먼 바다에 나가 수장하였다. 그 뒤 8월 19~20일(음 7월6~7일) 양일에 걸쳐서는 속칭 정뜨르(제주비행장)에서 수백명이 군경에 의하여 학살 암매장되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이 증언자들에 의하여 밝혀져있다. 그후 반세기가 넘도록 유족들은 학살장소로 모르고 시신마저도 수습하지 못한 채 수난과 고통속의 암울한 세월을 살아왔다. 그동안 역사의 조류는 변화를 거듭하여 이념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마침내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시행되어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조사활동이 이루어져 비로서 예비검속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밝혀졌다. 2003년 10월 31일 정부를 대표하여 노무현대통령께서 과걱 공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매 53년동안 하맺힌 유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피멍이 녹게 되었다. 유족들은 2002년 2월 제주북부예비검속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정성을 모아 세사를 올릴 수 있도록 제주도와 제주시, 북제주군의 지원으로 여기 시민의 정성 깃든 공원에 제단을 조성하고 위령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