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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유적비(反共遺跡碑)'는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때 진주지역에 있었던 좌우익의 투쟁사례중 대평면에서 벌어졌던 빨치산과 우익세력간의 무장투쟁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기념비이고 진주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기간동안 극한적인 이데올로기 투쟁 끝에 좌익세력의 죽음위에 세워진 우익인사의 추모비이다. 지금은 남강댐 수몰지역으로 면세가 퇴락했지만, 대평면은 옛 진양군 지역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 당시만 해도 이곳은 지주와 소작인간의 착취관계가 심한 편이었고 해방 이후 그로 인한 좌우익 대립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이 반공유적비에 나타난 김영신은 해방정국 당시 독립촉성국민회의 대평면 회장을 맡으며, 이른바 ‘좌익사냥'에 앞장선 대평지역 우익세력의 간판인사였다. 해방 후 미군정과 정부수립 후 김영신은 한국전쟁으로 ‘우익사냥'을 당하게 됐다. 그동안 수세에 몰려 있었던 좌익세력들은 인민군이 1950년 8월 진주지역을 점령하자 이번엔 이들이 우익사냥을 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진양군 대평면의 자위대원들은 두차례씩이나 김영신의 집을 덮쳐 가택수색을 벌였으나 그는 이미 도망간 상태였다. 대신에 좌익세력들은 그의 집을 압류하고 집안에 쌓여 있는 40여평의 장작더미를 징발해 당시 대평리 옥방마을에 주둔중인 인민군 7사단에 공급했다. 하지만 김영신은 인민군의 패퇴와 국군의 진격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평면으로 다시 돌아왔다. 인민군 부역자 색출에 나선 경찰대와 그는 좌익세력에 대해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해 이 지역 좌익세력들은 재빨리 빨치산으로 조직전환해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결국 밀고 밀리는 각축전 속에서 1951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1년째가 되던 날 남로당의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대평면 상촌리를 기습공격해 그동안 벼르고 있던 김영신을 마침내 살해하게 됐다. 내용출처 : 도서출판 사람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