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page


204page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진주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진주시 강남동, 망경동, 주약동 주민 등 수백 명은 진주시 주약동 약골의 진치령 터널(길이 240여m)로 대피했다. 진치령 터널에는 당시 많은 진주 주민들이 대피, 터널 안에서 숙식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 8월 3일 오후 5시 정도에 진주시 주약동 방향(현재 주약동 세란병원)에서 3~4대로 구성된 전투기 편대가 출몰해 저녁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기총사격에 이어 폭격까지 감행했다. 미군 전투기들은 피난민들에게 기총사격을 한 후 선회, 한 차례 더 사격을 가한 후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결과] 진치령 터널 입구에 있던 피난민 40~50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사고 현장에서 오른 쪽 발목에 관통상을 당한 김사복[76세, 진주시 가좌동]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약동 쪽에서 미군 쌕쌕이 편대가 나타나 기관총 사격을 가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면서 “터널 안은 떨어져 나간 팔, 다리가 널부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기총사격으로 아버지를 여읜 당시 9세였던 목격자 정삼근[58세, 진주시 주약동]은 “저녁 무렵 전투기가 나타나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십 명이 즉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며 "아버지도 당시 기관총 사격을 받아 즉사해 인근 야산에 안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인 김영두[65세, 진주시 주약동]는 “사고가 발생한 지 2개월 후 철도 개통을 위해 시신 정리작업을 위해 진치령 터널을 찾았을 때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가 완전히 지옥이었다”며 당시의 참혹함을 증언했다. 출처 : 디지털진주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