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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凡(인범) 윤장호 교수 考證(고증) - 호국경찰 잔교리전사 충혼탑 비문 잔교리 출동 1948년 12월 말 38도선 경비를 미군으로부터 경찰이 인수하면서 경찰관을 대폭 증원한 뒤로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피아간 무장충돌이 빈발하였다. 1949년 2월 2일, 주문진경찰서 대리지서주임 최영효 경위는 본서에서 지서로 돌아가던 도중. 잔교지서의 손영규 경사 이달호 순경과 동행하여 장교리를 지나갔다. 이때 38도선 이북의 기사문리에 주둔 중이던 북괴군이 불의에 사격을 가하여 이달호 순경을 살해하고 최영효 경위에게 총상을 입혔다. 손영규 경사는 즉시 잔교지서원 30명을 비상소집하여 사태에 대응하였다. 적은 후방으로부터 병력을 보강하여 잔교지서를 공격하였다. 잔교지서원들은 이에 대한 방어전을 폈으나 중과부적으로 지서에서 물러나 외곽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 급보를 받은 주문진서장 김영춘 경감은 주문진서 병력 1개 중대 90명을 직접 지휘하여 잔교지서를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적도 양양으로부터 병력을 증강하였다. 24시간이나 접전이 계속되었으나 지서를 탈환할 수가 없었다. 당시 경찰은 소화기 밖에 보유하지 못하였지만, 적은 박격포 중기관총 등을 동원하여 화력면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문진서 병력만으로는 지서 회복이 불가능해지자 강원도경에서 250명의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2월 4일 15:00에는 주문진 주둔 육군부대 1개 대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여기에 묵호 해군기지 사령부의 함정까지 동원되어 육·해 양면의 반격작전을 전개하게 됨으로써 7일 지서를 탈환하였다. (경찰대학교 교수 윤장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