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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이곳은 우리나라 중동부 해안에 접한 변방으로 일찌기 삼국시대부터 남북세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삼일운동때에는 양양읍에서 불붙기 시작한지 7일째 되던 4월 9일 천여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노도와 같이 일어나 적수공권 항거하다가 잔악한 일제군경의 총탄에 9명이 순국하였으니 지금도 유혈이 낭자했던 그 고개(북쪽500미터_를 만세고개로 부른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미.소 양국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엔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는데 합의하였으나 8월 하순 소련군은 현남면 시변리까지 남하하여 일시 진주하였다가 동년 9월 초순 미군이 38선의 정확안 지점(표석에서 남쪽 30m)을 찾아 북상하였으나 자연지세의 의한 편의상 현 잔교리 하천을 중심으로 북쪽능선에는 소련군초소가, 남쪽능선에는 아군 초소가 설치되어 남북왕래가 끊기어 혈육이 생이별하고 서로가 적대시하는 민족적인 비극이 비롯되었다. 이처럼 당초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일시적 군사분계선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후 남북분단을 고정시키는 정치경계선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1950년 6.25동족상잔의 참상을 낳고 말았다. 6.25동란중에는 피아간 일진일퇴의 격전장으로 폐허화되었으며 동년 10월 1일 분단이래 최초로 국군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최초로 돌파 북진함으로써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게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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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숭고한 호국의 얼이서린 이곳에 6천만 겨례가 하나될 날을 앞당기려는 간절한 염원과 성심에서 민족통일 양양군협의회 회원이 주체가 되고 뜻을 함께하는 강호제현의 협찬으로 분단역사와 통일의지의 산 증표로 삼고자하여 본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38선을 상징하기 위해 3단계의 양입석을 8각의 기단위에 3.8m의 높이로 세우고 조국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 합장하는 모양의 양입석 비신위에 38선 표석을 올려놓았다. 김문기 국회의원이 '평화통일'을 휘호하고 고경재 문화원장이 '유래'를 작성하고 김광희 선생이 불망기와 유래를 쓰고 38선 좌대를 설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