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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제천에서 한때 승전도 했지만 병신년 오월에 패전하고 류의암 인병서 행함에 공이 영월에가 사양하고 돌아와 백의 백림으로 두문불출하다가 노환으로 운명했고 금계 이근원공 묘갈문에 만고 대의 일심종시라고 칭찬했다. 중재공은 고종 병인년에 상진에서 나시어 총명 민첩하고 담력이 있어 일을 처리함에 구차하지 안았다. 부친 감찰공을 따라 류의암 의병진에 덜어가 민병대장 직책과 전복및 군도를 하사받아 장림에 파견되고 참모 이숙하 서기 김동일과 그외 병졸을 인솔하고 민병소를 설치 군무수행중 충주성으로 이동 성첩을 방어하며 임전 수개월여에 일시 승전도 했으며 장림에 회진하여 선봉장 김병수와 애구를 지키고 대진이 패전하여 단양에 올때 나아가 영접했으니 좌우 선봉장 참모장 이강년 이희두 정운경 한동의 손중국 모든 장수였다. 사월 십육일 중군 임을 행할때 중군장이 결원인고로 공이 대행 임명했고 그 후 친환위중으로 집에 돌아왔다. 본진이 외적에 패함에 사병은 흩어지고 대진은 요동으로 가고 병참은 몰락됬다. 공도 집에서 명을 기다릴때 외병 참소 수색이 극심해 군도를 납품 강요하며 포박 투옥 소환 고문 협박등 여러차례 가중했으나 종내 불굴했다. 친상 삼년후 정미년에 후기 의병이 다시 일어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운강 이강년공과 합세 참진했으나 기록이 유실되어 공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경술국치후 양방산 집에 여생을 휴양하고 향년 칠십일세로 서거했다. 국가 보훈처에 등록되고 건국훈장이 내려왔다. 유림주최로 창의 숭모비를 건립하니 천추에 기념이요 만인의 추앙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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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군대장 장공익환 한말 고종 32년 을미 외적이 단발령을 공포 머리를 깍아 외의 풍속 따르니 재화가 선비에 까지 미치는 지라. 사람이 분통 창의할때 우리 단양에 항외구국운동의 효사진충 한분이 있으니 인동장공 양대 선생이시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휘 제급의 아드님 휘 충식 손자님 휘 익환공은 현종 병신년 상진리 세거로 사는 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재주가 있어 팔세에 능히 시를 지었고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직을 지냈고 시국을 관망하여 어찌 사대부 편히 앉아 있을때냐 하고 동지를 합하여 창의 하기로 하고 서열을 정비하니 대장 이필휘 중군 이춘영 선봉 김백선 군사 서상열 서기 원용정 참모 이필근 안승우 공도 참모역을 맡아 작전계획을 세워 출전하여 장희 싸움에 승리를 거두었다. 주선하여 의암 류린석공과 영월에 회합하여 추대해 대장을 삼고 처변삼사를 약정하니 첫째 외적을 처서 의를 밝히고 둘째 외국에 망명하여 도를 지키고 셋째 죽음으로 투쟁 결심하고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소집하고 군무를 재편함에 공은 사객의 군무를 맡아 내빈을 응접하고 입영자를 선별 천거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충주성 싸움에 처음에 승리했으나 종내 불리하여 진을 제천에 옮겨기고 공이 계책 십조를 제시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감탄하여 시를 읊으니 임진년은 어제 같은데 원수를 만나니 신하된 자 마땅히 죽을때이다. 힌머리로 종군하는 것을 사람은 웃지말라. 단심으로 보국하는 것을 내 어찌 사양하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