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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의사는 1900년 평북 희천군 서면 극성리 빈농의 아들로 출생하셨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을때 울분을 못참아 만주로 건너가 간다 참의부에 가담하여 조국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충청, 경상, 강원 삼도 소백산을 중심으로 맹활약 했으며 김찬섭, 김의엽, 김율녀등 8인과 비밀결사단을 조식, 주로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는 총책을 맡았다. 조선총독부에서 체포명령이 내렸으나 신출귀몰하는 김의사에게 번번히 실패하고 사상자가 많아지자 총독부로부터 사살명령이 내려진다. 1927년 12월 4일 ?망봉 석륜암에서 동지인 김찬섭, 김의엽, 김율녀는 체포된후 청주로 압송되어 5년의 옥고를 치루었고 김의사 부모는 왜경에 끌려가 아들의 은거지를 대라고 수십차 고문을 당했고, 실신하면 금성여관에 강금하는 등 가진 만행을 자행했다. 1928년 6월 9일 보발, 금곡의 부호들이 독립군 군자금 모금에 불응하자 가축과 재산에 피해를 주어 왜경은 폭도라고 규정했고 친일파로부터 영춘면 동대리 형제봉에 은거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단양경찰서 소속 왜경경부보 평석을 대장으로 3도 합동토벌대 4개분대 백여명이 김의사 은거지를 집중포위 잠복하다가 김의사가 자고 일어나 토굴밖으로 나서는 순간 평석이 쏜 총에 하복부 관통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평석을 쏘았으나 모자만 맞았으며 총성에 놀란 김두배의사가 김의사를 구하려고 응사했으나 백여명의 집중사격에 두분이 쓰러지니 그때가 1928년 9월 9일 오전 9시로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국광복이란 원대한 꿈을 이루지도 못한채 가셨으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유품은 태극기, 권총2정, 실탄150발이었고 시신은 단성면 구 송장벌에 합장되었으며 두분의 깊은 뜻을 길이 후손에 전하고 애국애족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리고자 그 사적을 여기에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