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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0일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와 마조리에는 탱크의 무차별 공격과 비행기의 기총소사가 이루어지며 한바탕 겨울 난리가 났다. 전날 소백산에 자리잡고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마을로 내려와 총을 들이대며 음식과 잠자리를 요구한 일이 있은 뒤 하루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1950년 9월 일 이후로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대한 민국의 영토 대부분을 미군과 한국군이 점령했다. 먼 단양군에서는 불안과 긴장의 날이 그치지 않았다. 바로 소백산 지구에서 인민군 잔류병들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단양읍 노동리와 미조리 일대에는 수시로 비행기의 폭격이 있었다 당시 미군은 단양읍내의 상진리와 증도리에 주둔하면서 인민군과 접전을 하고 있었다. 음력 12월 2일 밤에 인민군들이 내려와 총을 들이대며 음식과 잠자리를 요구했으며 단양읍 노동리의 서학출씨 집에 10여명을 비롯해 여러 가구에 삼삼오오 들어가 그날 밤을 보냈다. 2일 밤의 폭격으로 인해 인민군 1명이 사망하고 3월 새벽에 인민군들은 전원 소백산으로 후퇴했다. 곧 있어 탱크와 항공기 폭격(기총소사)이 계속되면서 탄광 사택사람들은 화약고로 숨고, 동네 사람들은 노동동굴 방공호, 집으로 피해있었다. 12월 2일에 화약고에서 40명이 사살 당했는데 미군이 마을로 들어오자 폭력을 피해 숨어있던 화약고 내의 사람들이 반가워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며 명하였는데, 미군이 갑자기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거의 전원이 사망하였다. 12월 4일에는 미군 선발이 세 명이 와서 이유 없이 초가집에다 총을 쏘아 집에 불이 나고 살기 위해 뛰쳐나오는 주민들과 가축들을 조준 사격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노동리의 정옥이씨는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잃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일일이 방화를 하고 사람과 가축을 모두 죽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갔다. 노동리에 이어 마조리에서는 살육전이 계속되었다. 당시의 살육전으로 인해 노동리와 마조리에는 성한 집은 단 한집도 없었고 소만 해도 180마리가 죽었다. 미군은 피난가는 여자를 해꼬지 하기도 했다. 만삭의 여성을 강간하고 백주 대낮에 한 여성을 여러 명의 미군이 윤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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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노동리와 마조리에서 방화와 살인과 폭격을 자행한 것은 3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불에 집이 다 타면서 집안에 있던 곡식도 모두 불에 타서 먹을 것이 없어 불에 탄 곡식을 주워 먹기도 했고 심지어는 죽어 있는 소를 먹기도 했다. 얼어있는 가축을 먹고 탈이 나서 죽은 사람도 있고 마을에 장질부사가 돌기도 했다. 실제로 현재 밝혀진 사망자 109명 중에는 전염병으로 죽고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인원은 빠진 상태이다. 당시의 부상자 중 현재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3명이다. 1명은 서울에 거주하고 단양읍 노동리에 거주하는 이소득씨는 83세로 수술을 하였으나 당시 입은 상처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오고 있기에 이후에 이 땅에서 인권유린 생명경시 선량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제 영현들께서 불법 만행에 의한 원한을 푸시고 영원한 안식 극락영생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7. 10 노동.마조 희생자 유족회원들이 함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