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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 버려진 9.28 수복(收復) 미군용사비(美軍勇士碑) 평양(平壤)서 출생(出生)한 쇼대위(大尉) 자원참전(自願參戰) 28세에 산화(散華) 미망인(未亡人)도 내한(來韓) 사회사업(社會事業) 부친(父親)은 군목제도(軍牧制度) 창설자 <동아일보> 1969년 9월 27일자 28일은 9.28서울수복 19주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당시 '유엔'군의 선두에 서서 용맹을 떨치다 이국 땅에서 산화한 한 미국인의 기념비가 이젠 주택가 비좁은 골목에 방치된 채 잊혀지고 있다. '윌리엄. H. 쇼' 대위의 기념비가 녹번동 약수터에 세워진 것은 지난 56년 9월 22일. 백낙준(白樂濬) 박사 등 유지들이 그가 전사한 이곳, 그때만 해도 잔디가 푸르던 언덕배기에 자리잡아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쇼'대위는 감리교 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와있던 '쇼'목사(한국명 徐煒廉)의 외아들로 22년 평양(平壤)에서 출생, 귀국하여 '하바드'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과정을 공부하던 중 6.25 동란이 터지자 "내가 출생한 한국의 친구를 위하여" 한국동란에 자원, 참전했다. 우리 나라에 온 쇼대위는 우리 나라 말에 익숙하고 지리도 잘 알아 인천(仁川)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장군의 작전계획에도 참여, 인천에 첫발을 디뎠다. 쇼대위는 인천상륙 뒤 수색대를 인솔, 녹번동 약수터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다 서울수복 엿새 전인 9월 22일 적탄에 맞아 나이 스물 여덟에 장렬한 초후를 마쳤던 것이다. 쇼 대위의 아버지 '쇼' 목사는 6.25 동알 뒤 미8군 군목으로 지원,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군목제도를 창설했으며 쇼대위의 미망인 쇼여사도 남편이 죽은 뒤 우리 나라에 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회사업을 펴는 등 '쇼' 대위의 가정은 우리 나라를 위해 한결 같이 공헌을 해왔다. 서울수복 19주년을 맞아 10여년 동안을 이 비 둘레를 말끔히 손질해 온 인근 주민 안창렬(安昌烈)씨(50)는 "서북향으로 서 있는 이 비를 약수터 경로당 앞으로 옮겨 남쪽을 향해 바로 세우고 비 주위로 꽃을 심어 가꾸었으면 좋겠다"고 당국의 배려를 아쉬워했다. [이시헌(李時憲)기자] [사진설명] 주택가 골목길에 쓸쓸히 잊혀지고 있는 '쇼' 대위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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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렴2세의 전사기념비 이전은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 것 같다. 인터넷에서 조사를 하다가 발견된 것. 출처 : 한국교회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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