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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秋義烈 尹奉吉 義士 崇慕碑(천추의열 윤봉길 의사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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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秋義烈 尹奉吉 義士 崇慕碑(천추의열 윤봉길 의사 숭모비)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地上(지상)의 定義(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義士(의사)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梅軒(매헌) 尹奉吉(윤봉길)을 義士(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尹義士(윤의사)는1908년 6월 21일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 枾梁里(시량리) 沐溪村(목계촌)에서 坡平尹氏(파평윤씨) 璜(환)공과 慶州金氏(경주김씨) 元祥(원상)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름을 禹儀(우의)라 했다. 자는 鏞起(용기) 호는 梅軒(매헌)이고 奉吉(봉길)은 그의 별호이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하에서 서당에 다니며 舊學(구학)을 공부하고 독학으로 新學(신학)을 익혔다. 고향에서 농민독서회를 일으켜 復興院(부흥원)을 세우고 夜學(야학)과 月進會(월진회) 修岩靑年會(수암청년회) 購買組合(구매조합)을 설립하는 등 암울했던 농촌에 등불을 밝혔다. 尹義士(윤의사)는 弱冠(약관)에 편술한 農民讀本(농민독본)에서 인생은 자유와 세상을 찾는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고 외친 그 心志를 마을과 마을에 심었다. 그러나 농민운동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윤의사는 황폐해가는 조국강산을 살리기 위하여 역경을 밝기로 결심하였다. 부모형제와 처자의 사랑보다 더 剛穀(강곡)한 사랑이라고 한 그 역경으로 가는 길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자기희생의 壯途였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 1930년 3월6일 23세의 尹義士(윤의사)는 결단의 표적을 남기고 세계제국주의의 각축장인 大陸(대륙)으로 떠났다. 한때 중국 靑島(청도)에 머물며 일한 노임으로 농민운동때 微債(미채)까지 갚을 정도로 그의 인격은 淸淨(청정)하였고 유서로 보낸 서신들에는 효성과 우애와 연모와 慈情(자정)이 가득할 정도로그의 성품은 자상하였다. 글속에는 가족에게 닥처 올 고통을 염려한 시름이 넘치고 글귀마다 壯心(장심)으로 달랜 혼적이 역력하다. 1931년에 윤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上海(상해)를 찾았다. 거기가 의사의 鴻志(홍지)를 심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공장에 몸을 숨겨 工友會(공우회)를 결성, 노동운동을 펴기도하고 소채장사도 하며 뜻을 기회를 살폈다. 그러다가 1932년 일제의 침략으로 일어난 상해사변을 눈여겨 보면서 웅지를 세웠다. 윤의사는 白帆(백범) 金九(김구)를 찾아가 轉人愛國團(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때에 상해침략의 야욕을 채운 일제가 虹口(홍구)공원에서 승전관병식을 거행할새 이를 그동안 쌓아온 포부를 단행할 기회로 삼았다. 드디어 4월29일 살벌하기 짝이 없는 철통같은 식자에 윤의사는 大義(대의)를 머금고 입장하였다. 그리고 오만한 식순이 열을 올리던 11시 40분 정의를 실은 폭탄을 던졌다. 폭음은 천자를 진동했고 식단은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군사령관 白川義則(시라가와)대장을 비롯한 단상의 원흉들이 일시에 쓰러졌다. 이 날의 폭음은 환상에 젖은 일제와 세계제국주의가 무너지는 弔鐘(조종)으로서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진을 여는 축포로서 인류의 평화와 양심을 외치는 웅변으로서 靑史에 빛나고 있다. 표효하는정의의 소리가 이에 더할 바 어디에 있으라. 이를 윤봉길의사 上海義擧(상해의거)라 한다. 이후 독립운등전선은 새삼 약동하게 되었고 제국주의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약소민족은 활력을 얻어 궐기하였다. 장자던 사람도 늪에서 해매던 사람도 생기를 찾아 새로 일어났다, 윤의사는 일제가 시든 나뭇잎처럼 항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이는 虹口(홍구)에서 불구가 된 重光葵(중광규:시게마쓰)공사가 1945년 미조리 함상에서 일제 항복을 조인한 광경을 예언한 것이기도 했다. 윤의사는 일본 大坂(대판)에 이어 金澤(가나자와)육군형무소로 옮겨져 1932년 12월 19일 불의의 형장에서 순국하니 25세의 영광스런 일생을 마쳤다. 역사는 인명이나 재화를 따르지 않고 義를 택하는 법 殉國(순국)이 어찌 범상한 죽음일까보냐. 유해는 金澤형장의 길가에 묻혀 행인이 밟고 다닌 수모를 겪었다. 逆天(역천)도 두려워하지 않는그 야만성은 제국주의가 빚은 미몽 탓이런가. 8.15해방을 맞아 애국동지들이 李奉昌(이봉창), 白貞基(백정기)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하여 1946년 6월30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三義士(삼의사)가 안장되어있는 효창공원은 민족의 義烈聖地(의열성지)가 되었다. 태극의 깃발을 날리며 나의 빈 무덤앞에 찾아와 술을 부어 달라는 의사의 유언을 되새기는 듯 赤誠(적성) 어린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枾梁里(시량리)에 핀 꽃이 虹口(홍구)에서 열매 맺어 그 열매가 金澤(가나자와)에서 삭아 효창공원에 새 씨앗으로 살아남이 아니냐. 그 씨앗은 겨레의 양심과 정의의 꽃으로 다시 활짝 피어나고 있다. 어찌 의사의 일생이 끝났다고 하리오. 遺烈芳香(유열방향)이 곧 영원한 생명이 아닌가. 시량리에는 월진회가 재건되어 해마다 님그린 제전을 펼치고 있다. 새로 단장한 옛집에는 光顯堂(광현당)과 狙韓堂(저한당)의 현판이 걸리고 뜰 안에 세운 기념관에는 의사의 유품들이 민폭의 앞날을 축복하고 있다, 지나는 나그네 조차 暗黑東天(암흑동천)에 啓明星(계명성)이 밝아온다는 枾梁洞歌(시량동가)를 외우고 겨레의 端氣(서기)를 노래하며 간다. 1966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또 충의사를 세운데는 鄕民方伯(향민방백)의 정성이 컸다. 뜻은 누리고 퍼져 농민운동의 후광이 새나라 들녘을 밝히는 기운데 곳곳에 기념물이 서고 문사들은 遺芳(유방)을 강론하고 評傳(평전)을 간행하였다. 추모사업은 잇따라 매헌 농민상과 매헌장학회와 영부인 裵用順(배용순)여사를 송덕하는 효부상이 설치되었다. 1987년 의거 55주년을 맞아서는 언론계와 경제계의 지원이 컸다. 그 때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서울의 관문인 이 곳 양재벌에 세워 시만의 丹精(단정)을 모으고 있다. 60주년에는 국내외 학계와 정계까지 참여한 성대한 기념행사가 있었다.鄕民(향민)을 비롯하여 정치 경계 문화계 모든 이가 윤의사의 생애를 날로 높여 기리는 것은 의사의 삶이 영원한 敎範(교범)이 되기 때문이다. 義士(의사)가 택한 죽음을 휴금에 새겨 두는 것은 정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의 사랑은 겨레와 인류의 자유, 평등, 평화를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님의 뜻을 顯彰(현창)하고 숭모하는 것이다. 일생을 아름답게 살고 값 있게 죽는 길을 찾는 이는 모름지기 여기에 와서 매헌 윤봉길의사의 삶에서 배우라. 그 誓石(서석)을 세워 천추에 전하는 바이다. 1993년 4월 29일 상해의거 61 주년을 맞아 趙東杰 謹撰(조동걸 근찬) 朴秉濠 謹書(박병호 근서) 尹喆相 表誠(윤철상 표성) 梅軒尹奉吉義士紀念事業會 立(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