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age

22 23 국가는 미국·호주·캐나다·태국 등 4개국이었고, 육군과 해군을 모두 보낸 국가는 영국·네덜란드·프 랑스· 뉴질랜드·콜롬비아 등 5개국이나 되었다. 또 육군과 공군을 동시에 보낸 국가는 그리스가 유일하였다. 유엔 회원국들의 파병을 군별로 분류해 보면, 육군을 보낸 국가는 15개국이나 되었다. 전투부대 파병 국가 중 남아프리카공화국만이 지상군을 보내지 않고 공군을 파병했다. 해군을 보낸 국가는 9개국이었고, 공군을 보낸 국가는 6개국에 이르렀다. 또한 의료지원부대와 의료시설을 보낸 국가로는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이아 등 5개국 이나 되었다. 이들 유엔 회원국 군대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한국 전선에서 모든 유엔 회원국 군대를 통괄하는 미 군의 방침에 따라 한국에 설치된 유엔군 보충대에서 미군 교리에 의거 실전훈련을 받았다. 이후 한국에서 현지 적응 훈련을 받은 유엔 회원국 군대는 미군 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미군 사단에 배속될 때 파병된 유엔 회 원국 군대의 규모에 따라, 대대급은 미군 사단의 연대에, 여단은 사단 또는 군단에 배속되어 미군 지휘관의 지휘를 받 았다. 미군 부대에 배속될 때는 언어와 관습, 그리고 각 국가별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배치했다. 다만 한국에 파병된 유엔 회원국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던 영국 2개 여단만 1951년 7월 28일 영연방 제1사단으로 재편성되어 독자적인 지 휘체제하에 작전을 수행했다. 이때 영연방 제1사단에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그리고 영연방 국가는 아 니지만 영국으로부터 보급지원을 받는 벨기에군이 여기에 속했다. 이렇듯 6·25전쟁은 유엔 헌장을 위반한 침략의 주범인 북한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해 “다시는 지구 상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유엔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응징 차원의 전쟁이었다. 이처럼 유엔 은 6·25전쟁을 통해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무시하며 침략행위를 계속한 북한 공산주의에 대해 최초로 집단안전보장 조치를 취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 아마도 6·25전쟁 때 국제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에 대해 유엔의 조치가 성공하지 못했거나, 미온적인 조치로 끝났다면,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평화기구로 설립된 국제연맹과 마찬가지로 유엔도 오늘날과 같은 권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 때 국제 평화를 파괴하고 유엔 헌장에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낸 북한의 불법침략에 대한 유엔의 신속하고도 강력한 조치는 유엔에게 닥친 첫 시련을 잘 해결함으로써 오늘날 유엔이 그 창설 목적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시금석(試金石)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이 오늘날 경제대국, IT강국, 스포츠강국, 문화대국으로 발돋움하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6·25전쟁 때 유엔의 적시절절한 조치와 21개 자유우방국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낯선 땅 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4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유엔이 항구적인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 국제평화기구로서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아울러 유엔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기사회생(起死回生)한 대한민국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으로서 계속 남아 국제 평화에 기여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 때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취한 유엔의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이 취한 조치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남 정 옥 이렇게 해서 지상군을 파병한 유엔 회원국은 미국과 영국 두 나라였고, 해군을 파병한 유엔 회원국은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캐나다·프랑스·뉴질랜드 등 7개국이었다. 또 공군을 파병한 유엔 회원국으로는 미국·호주·캐나다 등 3개국이었다. 따라서 이 기간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 유엔 회원국은 모두 7개국에 달했다. 이중 대표적인 전투로는 미국 육군과 해군에 의해 수행된 오산전투, 대전전투, 왜관전투, 낙동강돌출부전투, 마산전투 등을 들 수가 있다. 둘째 단계는 유엔군의 북진 및 반격기(1950.9.15~ 11.25)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 소련과 만주 국경의 초산-혜산진 선까지 진격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전투부대 및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유엔 회원국으로는 필리핀의 육군, 호주의 육군, 스웨덴의 적십자병원, 터키의 육군, 태국의 육·해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군, 인도의 야전병원, 네덜란드의 육군 등 총 8개국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엔 회원국에서 파병한 육군은 필리핀·호주·터키·네덜란드 등 4개국이었다. 해군은 태국에서, 그리고 공군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파병했다. 의료지원국은 스웨덴과 인도 등 2개국이었다. 이 중 대표적인 전투로는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원산상륙작전, 군우리전투, 정주전투, 박천전투 등이 있다. 셋째 단계는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의 재반격기(1950.11.25~1951.6.23)로 중공군의 개입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천 선(37도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하게 되는 기간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군대 및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유엔 회원국으로는 프랑스의 육군, 그리스의 육·공군, 캐나다의 육군, 뉴질랜드의 육군,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육군, 덴마크의 적십자병원선, 에티오피아의 육군, 콜롬비아의 육·해군, 노르웨이의 이동외과병원, 태국의 공군 등 모두 11개국에 달했다. 그 가운데 육군을 파병한 유엔 회원국은 프랑스·그리스·캐나다·뉴질랜드·벨기에·룩셈부르크·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등 8개국이었다. 해군을 파병한 유엔 회원국은 콜롬비아이며, 공군을 파병한 국가는 그리스이 다.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유엔 회원국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등 2개국이었다. 이 기간 중 대표적인 전투로 는 장진호전투, 흥남철수작전, 김량장전투, 횡성전투, 쌍터널전투, 지평리전투, 벙커고지전투, 현리전투, 가평 전투, 설마리전투 등이 있다. 넷째 단계는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6. 23~1953. 7. 27)로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쌍방이 38 도선 부근에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며 휴전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는 유엔 회원국이 아닌 이탈리 아가 적십자병원을 파견하여 한국을 지원했다. 이 기간 중 대표적인 전투로는 단장의능선전투, 피의능선전투 , 저격능선전투, 불모고지전투, 화살머리고지전투, 포크찹고지전투, 율동전투, 노리고지전투, 김화351고지 전투, 삼각고지전투, 적근산 삼현전투 등이 있다. 21개국 유엔군의 참전 및 활동 전투부대와 의료지원부대를 보낸 유엔 회원국은 모두 21개국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육·해·공군을 모두 보낸 1951년 서울 북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