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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1 그 결과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겠다는 유엔 회원국들의 수가 늘어났다. 영국은 해군 파병에 이어 보병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1개 기갑연대·지원포병·기타 부대 등 총 7,000명 규모의 부대 파병을 제의했고, 호주는 1,000명으로 구성된 1개 보병대대의 파병을, 뉴질랜드는 1,000명으로 구성된 1개 포병대대의 파병을 제의했다.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도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보병여단과 공군 수송대대의 파병을 제의했다. 이어 터키, 태국, 필리핀, 그리스도 전투부대의 파병을 제의해 왔다. 터키는 4,500명 규모의 1개 연대전투단을, 태국는 4,000명 규모의 1개 전투단 파병을 제의했다. 필리핀도 5,000명 규모의 1개 연대전투단 파병을 제의했다. 그리스는 6대의 공군 수송기와 3,800명으로 구성된 1개 산악보병여단의 파병을 제의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속한 서유럽 국가들도 전투부대 파병에 적극 나섰다. 프랑스는 군함 1척과 1개 보병대대의 파병을 제의했고,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도 전투부대의 파병에 선뜻 응했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를 통제하던 미국 합동참모본부(JCS)는 50명으로 구성된 룩셈부르크 부대를 벨기에 대대에 통합하여 편성하도록 외교채널을 통해 조치했다.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대륙의 유엔 회원국에서도 전투부대의 파병을 제의해 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개 전투기대대를 구성할 수 있는 전투기 조종사와 지상근무요원의 파견을 제의했다. 이때 미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미군 전투기를 제공하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조종사들은 이 전투기를 타고 한국 상공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또 에티오피아도 10개 황실근위대 가운데 1개 대대를 선발하여 한국에 파병하기에 이 르렀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콜롬비아는 보병 1개 대대와 군함을 파병하여 한국을 지원하게 되었다. 또한 의료부대와 의료시설을 파견한 국가도 있었다. 덴마크는 의사와 간호사를 갖춘 병원선을, 스웨덴 은 야전병원을, 노르웨이는 부대수송용 선박을, 그리고 중립국인 인도는 앰뷸런스 부대의 파견을 제의해 왔 다. 한편 가장 늦게 유엔 회원국이 아닌 이탈리아까지도 야전병원을 파견해 한국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전선에는 지구상의 각 대륙에서 총 21개국이 전투부대와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하게 되었 다. 이로써 유엔은 국제 평화를 파괴한 북한의 무력도발에 대한 응징의 조치로 유엔의 무력행사권인 집단안전보장 조치를 최초로 발동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을 구원하게 되었다. 유엔군 사령부의 창설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파견하게 될 부대의 지휘 체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0 년 7월 7일,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한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결의안의 요지 는 “유엔군 사령부의 설치 및 사령관의 임명권을 미국에 부여하며, 유엔기 사용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 같은 결의는 유엔이 최초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 지휘기구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7·7결의안’에 따라 7월 8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일본 도쿄에 유엔군 사령부(UN Command)를 공식적으로 창설하고, 미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진들을 유엔군사령부의 참모로 겸임 발령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미 극동군 사령부가 한국 작전 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아 유엔군 사령부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 사령관은 미 극동군 사령부의 각 구성군 사령관인 미 제8군 사령관, 미 극동해군 사령관, 미 극동공군 사령관을 통해 유엔군의 지상·해·공군을 통합 지휘하는 지휘 체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또한 유엔군 사령관은 7월 13일, 미 제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을 유엔군 지상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그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조치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14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군의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이양했다. 이로써 유엔 회원국이 아닌 한국군은 한국 전선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는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고 전쟁 초기부터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싸우게 됐다. 작전 단계별로 보는 6·25전쟁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 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됐다. 그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 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퍼센트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특히 세계 전쟁사상 한 전쟁에서 한 국가의 심장부인 수도가 두 차례나 적에게 빼앗기고 빼앗는 전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격렬하게 치른 6·25전쟁은 대체로 4단계를 거치며 전개되었다. 첫째 단계는 북한군의 남침기(1950.6.25~9.15)로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 선에 이르러 그들의 최종 목표인 부산을 공략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공세를 퍼부었던 시기를 말한다. 이 기 간 동안 전투부대를 파병한 국가로는 미국의 육·해·공군, 영국의 육·해군, 호주의 해·공군, 네덜란드의 해 군, 캐나다의 해·공군, 프랑스의 해군, 뉴질랜드의 해군 등 7개국이었다. 지상군은 미국의 육군과 해병대, 그 리고 영국의 육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유엔 회원국이 파견한 각국 해군은 유엔 의 해안 봉쇄작전 및 엄호작전,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지상군에 대한 근접지원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했 다. 1951년 서부전선 1951년 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