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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 국군 증강과 복구사업에 큰 업적을 남긴 맥스웰 테일러 제 8군 사령관(1953.2~1955.3) 테일러 장군은 명석한 두뇌를 지닌 뛰어난 지휘관으로 1922년 웨스트포인트를 4등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또한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기도 하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시 그는 미 제101공수사단장으로 글라이더를 타고 상륙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소련의 베를린 봉쇄사태 당시 베를린 주둔 미군 사령관·웨스트포인트 교장·행정참모부장을 거쳐 제8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는 7개 국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군정가로서의 능력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착상태였던 휴전회담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급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1953년 7월 중공군의 공세로 초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곧 경비행기에 의한 병력 수송 등 신속 과감한 조치로 적의 최종 목표인 화천 저수지를 사수, 위기를 모면했다. 휴전 후 테일러는 국군 증강과 복구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휴전으로 군사분계선이 새로 설정되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또한 ‘미군의 한국지원(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계획을 수립, 대규모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했으며 동양 최초의 야전군인 1·2군사령부 창설을 주도, 전후 국군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 1955년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 극동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합참의장과 주베트남 대사를 역임하여 케네디 정부 시절 베트남전쟁에 깊이 관여하였다. 전역 후 그는 <검과 쟁기>(Swords and Plowshares)라는 기념비적인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휴전협상에 조인한 마크 클라크 3대 유엔군 사령관(1952.5~1953.9) 클라크 장군도 역대 유엔군 사령관과 같이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1917년 임관했다. 그의 사관학교 동기생으로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리지웨이 장군이 있었다. 클라크 장군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미국이 유럽 전선에 최초로 파견한 미 제5군 사령관으로 크게 활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오스트리아 점령군 사령관 겸 고등판무관, 미 본토의 제6군 사령관을 거쳐 포트 먼로에 위치한 야전군 사령관으로 재임 중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는 유엔군 사령관 부임 당시 거제도 포로폭동사건을 계기로 이제까지 미 제8군이 모든 한국 전선을 전담하던 것을 전방과 후방으로 분리시켰다. 그는 대전을 중심으로 그 이북의 전선지역은 미 제8군이 맡도록 하고, 그 이남은 KCOMZ(병참관구사령부)를 창설해 전담토록 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 풍부한 군정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후 복구와 한국군 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 전선에 외아들을 중대장으로 참전시키기도 했던 그는 한일간의 우호적인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도쿄에 있는 그의 관저로 이승만 대통령을 초청, 일본 수상 요시다와의 회담을 주선하며 한국의 통일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군인인 그에게 6·25전쟁은 불행했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휴전협상에 서명한 최초의 미군 장군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휴전협상 수석대표 찰스 터너 조이 미 극동해군 사령관·휴전협상 유엔군 수석대표(1951.7~1952.5) 미국 해군의 터너 조이 중장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여한 미 해군 제독이다. 1952년 5월까지 휴전협상의 유엔군 측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 초기 미 극동해군 사령관이었으며, 1951년 7월부터 1952년 5월까지 개성에서 시작하여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진행된 휴전협상의 유엔군 측 수석대표였다. 협상대표단을 이끌고 북한군과 중공군 혼성 대표단을 상대로 어려운 휴전협상을 진행시켰다. 조이 제독은 휴전협상 도중인 1952년 5월 도중하차했다. 1953년 7월 27일 그의 후임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미 육군 중장과 북한군 대표단 단장 남일이 정전협정을 타결했다. 휴전협상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유엔군 쪽에서는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Clark) 미국 육군대장이, 공산군 쪽에서는 김일성 북한군 총사령관과 팽덕회 중국지원군 사령관이 이에 확인서명함으로써 휴전이 발효되었다. 조이 제독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55년 휴전협상 과정에서 그가 상대해야 했던 북한 공산군 측의 ‘협상 행태’와 ‘협상 기법’을 모아서 ‘협상학’에 관한 불후의 명저를 남겨놓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Communists Negotiate)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은 이후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시 바이블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미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며 국가를 위한 마지막 소명을 다하고 일생을 마쳤다. Maxwell D. Taylor 1901.8.26~ 1987.4.19 Charles Turner Joy 1895. 2. 17~1956. 6. 6 Mark W. Clark 1896.5.1~1984.8.17 13 12 한국 육군의 아버지 제임스 밴플리트 제 8군 사령관(1951.4.14~1953.2.10) 미국 뉴저지 주에서 태어난 밴플리트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제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6·25전쟁 중에는 제8군 사령관을 지냈다. 제8군 사령관에 부임한 밴플리트 장군은 국군의 훈련과 전력보강을 통해 국군을 오늘날의 정예군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제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적과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한국군 사단을 9주간씩 교대로 재훈련시킬 만큼 한국군의 전력향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신병훈련소 설립을 지시했다. 훈련소는 1951년 8월에 설립된 후 확대·개편되고 나중에 보병학교·포병학교 그리고 통신학교로 재편되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해 웨스트포인트를 모델 삼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도 결정적 공헌을 했다. 미 육사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도록 후원했던 그는 전역 후에도 모금활동을 전개해 육사 도서관을 지어 기증할 정도로 한국군 발전에 끝없는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육군은 밴플리트 장군을 기념해 그의 동상을 육사 교정에 세웠고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또한 그는 전역 후 한미재단을 설립해 한국의 전후 복구에 기여했다. 밴플리트 장군의 사후 그를 기념하는 밴플리트상이 제정되어 한미 관계에 기여한 인물에게 시상되고 있다.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에는 백선엽 장군(예비역 대장)이 수상했다. James Alward Van Fleet 1892.3.19~ 1992.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