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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 여는글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 1978년 창설되어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 및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한·미 연합군 사령부 (Combined Forces Command, CFC)의 구호이다. 이 구호가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미군은 한국의 초기 국가형성, 경제발전, 번영을 향한 도약의 시기를 변함없이 함께해 왔다. 6·25전쟁은 그 자체로서는 비극이지만 동시에 한·미 양국의 굳은 협력관계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미국이 최초로 근대적 관계를 형성한 출발점은 1882년의 ‘조·미 수호통상조약’ 이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정체성 수호의 딜레마 사이에서 좀처럼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당시의 조선과, 서구의 아시아 경략(經略)의 연장선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 미국 사이에는 결속을 보장할 만한 공통이 익이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이익과 일본의 조선 통제를 맞바꾼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인해 한·미간 첫 결속의 계기는 덧없이 스러졌다. 1945년 한반도 해방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일제의 패망에 의해 독립을 성취한 신생국가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입장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 38도선을 중심으로 미·소 양국군의 분할 진주와 3년간의 군정을 실시한 주체였지만 한국이 지니는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인색 한 판단을 내렸다. 이는 신생 한국에 대한 군정 기간 중 한국의 국방군 창설과 관련하여 미국이 수립했던 ‘뱀부’(Bamboo) 계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미군은 한국 자체의 군대를 창설하되 “국립경찰의 보강을 위해 창설하고 발전”시키는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 태동하던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공산 측의 팽창 의도를 과소평가하는 한편, 한국의 잠재력에 회의적 시각을 가진 데에서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1950년 1월 ‘에치슨 라인’의 설정을 통해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제외하는 조치로 이어졌다. 6·25전쟁은 이러한 미국의 기존 시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기점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과 동시에 미국은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6월 26일 개최된 유엔 긴급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은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고 원상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하는 결의안을 주도하였다. 6월 27일에 는 한국에 대한 유엔의 군사원조 즉, 참전 결의안을 이끌어내었다. 미국은 유엔의 본격적인 참전결의가 이루어지기 이전인 6월 26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개최하여 북한의 남침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유엔군이 본격 구성되기 이전인 6월 말 이미 전황을 파악하고 미국의 군사대응 을 실시하기 위한 사전 조치들을 시행해 나갔다. 6월 29일에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직접 한반도를 시찰했으며, 7월 1일에는 미군의 선발대 격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군의 6·25전쟁 참전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이 유엔을 통과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 원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7월 7일의 결의안은 북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을 수호하기 위한 국제적 원조를 촉구했던 6월 25일 및 27일의 결의안이 실질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엔 결의 안 통과 직후 가장 신속하게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것도 역시 유엔군의 주축을 이루었던 미국이었다. 실 제로 이 결의안은 유엔군 사령부의 구성 및 운영과 관련하여 미국에 주요한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부여하였다 . 첫째, 유엔의 결정에 따라 유엔군에 병력을 파견하는 모든 국가들이 미국의 통합지휘(unified command)를 받도록 규정하였다. 둘째,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군의 지휘관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7월 7일 결의 직후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통해 유엔기를 미국에 전달하였고, 미국 측 추천에 따라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후의 과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6·25전 쟁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군은 단순한 지휘권만을 인수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유엔군 그 자체였다. 미국이 6· 25전쟁 기간 동안 파견한 군대는 미 제8군, 제7함대, 제1해병사단, 제5공군 등을 포함하여 연인원 178만 9,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전체 유엔군 병력의 90퍼센트를 육박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인명피해 규모는 13만 7,0 00여 명에 이른다. 미국 내에서 20세기 주요 참전 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과 함께 6·25전쟁을 꼽는 것도 이러한 막대한 참전규모와 피해에 기인한다. 전쟁기간 중 미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이 북한군에게 포로로 6 ‧ 25전쟁 60년, 한‧ 미 동맹 60년 1951년 5월 강원도 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