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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명사칼럼 글 홍사덕 제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소속 18대 국회의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그 는 서울대 최초의 해병대 입대자로도 유명하다. 중앙일보를 거쳐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현재까 지 6선의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젊은 시절, 충동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린 덕분에 평생 큰 덕을 보는 경우가 있 다. 20세기 초반 일본 정재계를 주름잡던 다까하시 고레끼요의 미국유학이 그랬 고 나의 해병 입대도 마찬가지다. 다까하시는 선교사의 말만 믿고 덜컥 도미유학길에 올랐다가 사실상 노예생활 자가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길을 뚫고 공부를 마친 다음 귀국해서 대장상(재무장 관)만도 세 번이나 하고 총리대신까지 역임한다. 도미유학이 모든 행운의 밑천이었다. 나의 해병입대도 전형적인 덜컥수였다. 대학 1학년을 마친 다음 등록금이 없었 다. 그냥 노느니 군대나 때우자고 생각했고 기왕 군대생활하는 것, 남들이 힘들다 고 하는 해병대에나 가볼까... 했는데, 공교롭게도 종로4가에서 해병 신병모집 광 고를 본 게 동기의 전부였다. 신병훈련소가 얼마나 살인적인지, 빠따라는 게 얼마 나 가공스러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다까하시의 경우는 도미유학이 노예생활로 이어졌지만 나의 경우는 무수한 빠 따로 점철되었다. 훈련소에 들어가자마자 키 큰 값을 하노라고 향도로 뽑혔다. 소 대원들 기죽이고 군기 잡기 위해서 향도가 대표로 빠따를 맞아야 한다는 상식 중 의 상식도 없었기 때문에 저지른 실책이었다. 첫 3주일은 엎드려서 자야만 했다. 신병훈련을 마친 다음? 늑대 굴을 지나서 만세를 부르다 보니까 사자굴인 격이 었다. 해병대 하고도 사령부 의장대로 뽑혀간 것이다. 서울대 출신 사병1호에게 대 검 꽂은 M1 소총을 공깃돌 가지고 놀 듯 하라는 명령인데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 싶겠지만....가능했다. 해병대니까 가능했다. 다른 데라면 안됐겠지만 해병대에서 는 가능했다. 귀국 이후 다까하시가 해낸 그럴듯한 업적들이 미국유학에서 얻은 지식과 관련 있듯이 제대 이후 내가 『해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은 해병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결혼만 해도 그렇다. 장모님의 반대가 소설에나 나올 법할 정도로 격렬했 후회 없는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