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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에서는 지난 1995년부터 매달 ‘이달의 호국인물’을 선정해 헌향하는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 국난을 당해 나라가 위기에 처 했을 때 최전선으로 나아가 큰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과 명장을 선정해 그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삶과 공적을 재조명하는 것. 전쟁기 념관에서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분들의 공훈을 찬양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헌향행사를 매월 첫째 주 목요 일 전쟁기념관 호국추모 실에서 거행하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 호국인물의 고귀한 정신을 깨닫는 계기 가 되고 있다. 이번 호부 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숭고히 산화한 해병대 출신 호국인물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장원 중위 (1929. 2. 11. ~ 1951. 11. 29. / 2005년 2월 선정) ● 이장원 중위는 1929년 2월 11일 충남 예 산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해병사관후보생 5기로 입 대하여 같은 해 9월 소위로 임관했 다. 임관 후에는 적 후방교란과 해안 봉쇄작전을 수행하는 해군을 엄호할 목적으로 창설되어 함경남도 영흥만 봉쇄선상의 요충인 5개 도서를 장악하 고 있던 해병 독립 42중대 소속 황토도(黃 土島) 파견소대장으로 부임하여 최전선에서 적과 대치했다. 당 시 황토도는 아군의 해상 봉쇄선상의 주요 요충지로 북한군은 이 거점을 점령하기 위해 수 차례 기습공격을 감행해왔다. 1951년 11월 29일, 이장원 소대장은 또다시 침공한 북한군 제25여단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맞아 소총사격을 집중시켜 적의 해안접근을 저지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이 황토도 에 상륙하자 치열한 교전을 하게 되었다. 교전 중 무전기마저 적탄에 파괴되어 본대와 교신이 두절, 아군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된 악조건 하에서도 이 소대장은 대원들을 독려하며 적 을 격멸하던 중 진내에 떨어진 적탄에 부하 3명과 함께 전사 했다. 소대장의 최후를 목격한 대원들은 분기충천하여 분대장 의 지휘 하에 모든 화력을 집중시킨 끝에 적군을 물리치고 진 지를 사수했다. 이로써 3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황토도 기습공 격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장원 소대장은 목숨을 바쳐 황 토도를 지킴으로써 적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데 결정적인 전 공을 세웠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 서했다. 김문성 중위 (1930. 8. 25. ~ 1951. 6. 8. / 2005년 6월 선정) ● 김문성 중위는 1930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나 1950년 8월 해병간부후보생 3기로 입대하여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해병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으로 중동부전선 도솔산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6월 4일 당시 해병 제1연대는 강원도 양구지역에 위 치한 도솔산에서 인민군 최정예 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 이고 있었다. 당시 도솔산은 중동부전선의 핵심 요충지로서 이 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해병대는 물론, 좌우에 인접한 아군이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따라 서 북한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도솔산 지구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서 김문성 소대장은 도솔산 24개 목표 중 가장 험준한 지점에 투입되었다. 적은 난공불락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자동화기로 집중 공격을 해왔고, 김 소대장은 탄우를 무릅쓰고 적 진지 50미터 지점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 도 목표를 눈앞에 두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김 소대장은 적탄에 피탄되어 장렬히 전사했다. 소대장의 전사 장면을 목격한 소대 원들은 격분하여 총돌격을 감행함으로써 마침내 적을 격멸시키고 미 해병대도 성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인 도솔산 목표지점을 완전 탈환하여 대한민국 무적 해병의 신화를 창조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9 Vol.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