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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 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숭 실대라는 제법 잘 나가는 대학 팀의 멤 버였지만 어느 날 덜컥 해병대 입대를 선언한다. 1037기로 입대한 그는 포항 1사단 72대대 7중대 3소대 IBS 부대에 서 근무했다. “제 포지션에 잘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군대를 하루이틀 미루면서 경쟁을 하기엔 제 미래가 너무 불확실했 어요. 그래서 군대문제부터 해결하고 다 시 시작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죠.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전역 후 다시 축구화를 신어 실업팀 입단을 준비하겠다는 생각. 하지만 막 상 군대에 가니 그 꿈은 정말 ‘꿈’ 같은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고된 훈련과 바쁜 일상에 축구는 그의 인생에서 멀 어져만 가는 듯 싶었다. 어느새 그의 장래희망은 제대하고 일반 직장에 취직하는, 운동선 수와는 거리가 먼 꿈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입대할 때는 다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군 생활 을 하면서 축구선수의 꿈에서 멀어져간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 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항상 수양록에 ‘나의 꿈은 프로축구선수’라 적으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항에 위치한 해병대 제1사단은 포항스틸러스의 경기를 단체관 람하곤 한다. 한때 축구선수였던 그도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채 관중 석에서 경기를 관람하곤 했다. 자신이 선택해 온 해병대였지만, 축구 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가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관중석에서 보는 것 은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의 꿈이 프로축구 선수였기 때문에 스틸야드에서 뛰는 선수들 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러웠고 또 꿈을 이룬 이들이 정말 대단해 보 였습니다.” 그의 마음속 축구선수에 대한 희미한 꿈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다시 싹트기 시작했다. “휴일에도 항상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또 축구든, 구보든, 행군이 나 어떠한 훈련이든 항상 선두에 서서 열심히 했습니다.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얘기가 ‘군 대에서 축구한 얘기’라는 말이 있을 정 도로 축구에 열광하는 군대인 만큼, 축 구선수 출신인 그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로 꼽는 경기 중 하나는 자대 배치 후 이등 병 신분으로 참가했던 첫 경기였다. 선 임이 모든 걸 보여주라고 주문하며 축 구화를 신겨줬고 김원일은 세 시간 동 안 죽어라고 뛰었다. 체육시간에나 축 구를 하다 온 해병들과 대학축구선수 출신 해병의 실력차는 상당했을 것이 다. 김원일에겐 자신의 축구인생을 모 두 건 한 판 승부였다. 온갖 기술과 테크 닉을 다해 수비수를 따돌리고, 선임들 이 발만 갖다 대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김원일의 군 생활은 ‘폈다’고 한다. 축구를 잘 한다고 이쁨을 받은 것은 둘째치고 군 생활 모든 이들의 소망인 휴가 면에서도 그는 분명 덕을 봤다. 사단 체육대회 때 우승해서 14박 15일 휴가를 받은 것은 물론 국 방부에서 주최한 군대스리가에서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14박 15 일의 포상휴가를 나간다. 군대스리가에서의 그의 활약은 신문 지면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선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그의 맹활약에 힘입어 1사단 팀은 해병대 대회에서 우승하여 계룡대에서 펼쳐진 해군 결승전에 출전한 다. 해군 작전사와의 결승시합에서도 3-0 승부를 마무리 짓는 쐐기골 을 성공시키는 등 맹활약하며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지금은 수비수이지만 군대스리가에서는 최전방 공격수였습니다. 매 경기에 득점을 했었습니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해병대다운 끈 끈한 팀워크가 다른 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말 좋았습니다.” Vol. 38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