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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00일이 지났다. 뉴스에서 연평도 소식은 간데 없지만, 우 리 연평부대 해병들의 눈동자엔 아직도 떨어지는 포탄과 화염이 박 혀있다. 오늘도 훈련과 근무로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훈련과 이 근무가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 1. 전원투입 작전 아침 06시 15분, 총 기상 15분 전 방송과 동시에 눈이 떠진다. 피로 가 누적된 탓일까. 하루를 시작하는 이 순간이 제일 힘들다. 가벼운 연병장 구보와 국군도수체조 후 이어지는 중대장님의 전원투입지시. 화포 이상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칼바람을 맞으며 포상으로 향한다. 간밤에 내린 눈이 포위에 수북이 쌓여있다. 막내와 함께 눈을 쓸어내 고 통신선로 체크에 나섰다. 통신 및 장비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 오늘도 이렇게 우리의 하루는 시작된다. # 2. 교육훈련 장면 오전 9시. 해가 뜬 지 오래지만 여전히 쌀쌀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지만 실내에서 쉬고 있을 수만은 없다. 포상에서는 주특기 훈련이 한 창이다. 오늘의 과제는 상위직책 임무수행. 전시에는 생사를 보장할 수 없기에 대리임무수행이 중요하다. 내 담당 주특기는 전포병으로서의 마지막 임무인 사수의 역할이다. 선임병이 될수록 한결 편해지니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위로 갈수록 자문을 구 할 나의 선임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결국엔 선생이자 가장 노릇을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자신 있다. # 3. 식사시간 오전 11시 40분.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한다. 한 구석에 여전히 포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이 보인다. 이제는 무 감각해 질만도 하지만, 여전히 그날의 치열했던 기억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전투식량이 아닌 따뜻한 밥과 국. 훈련의 고단함도 이 따뜻 함에 다 녹아내리는 듯하다. 따뜻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뱃속을 덥히기 시작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가슴에 떠오른다. # 4. 비사격 훈련 오후 1시. 포반이 하나가 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방열을 마치고 사격 준비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이번 훈련의 중점. 경쟁심에 타오른 각 포반 들은 1초라도 더 빨리 전투배치를 붙기 위해 뛰고 또 뛴다. 간혹 가벼운 찰과상을 입기도 하지만 별 개의치 않는다. 아픔보다 뿌듯함이 더 크기에 서로의 우측 가슴에 박힌 빨간 명찰이 자랑스럽고 유난히 돋보인다. 전에 는 별 의미 없이 하는 것 같던 반복의 비사격 훈련. 하지만 이 훈련 덕에 그 날의 대응사격이 있었음을 알기에 모두가 잔뜩 긴장한 채 훈련에 임한다. # 5. 취 침 22시 소등. 불이 꺼지기가 무섭게 새근새근 잠이 든 소리가 들린다. 녀석들 고단했나보다. 나도 눈을 감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이 났 구나. 긴장이 풀린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누가 했던가. 그날의 기 억이 떠오르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리보 다 몸이 먼저 반응하던 그 느낌은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걱정하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 6. 야간 근무 새벽 1시 30분. 알람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 따뜻한 아랫목의 느 낌을 좀 더 만끽하려 눈을 감고 있자 후임 근무자가 와서 내 귓가에 속 삭인다. “임준영 해병님, 임준영 해병님”. 위병소로 근무를 나갈 시간. 봄이 코앞에 온 것 같은 2월이지만 섬에는 여전히 겨울의 기운만 가득 하다. 같이 근무를 서는 후임병과 함께 위병소를 향해 걸어간다. 가볍 게 흩날려 쌓여있는 눈발이 워커에 날리듯 흐트러진다. 지금 새벽길 을 걷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불현듯 생각이 든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을 동생과 하루의 고단함을 잠으로 녹이고 있을 부모님 얼굴이 순 간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나 보다. 후임병이 뭐 좋은 일 있냐고 묻는다. 아니라며 시치미를 잡아뗐다. 하지만 지금 이 눈길 을 걷고 있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 좋다. 아침에 창문을 열어 눈길을 바라볼 가족들. 그들을 위한, 그들을 향한 내 발걸음이 너무나 좋다. Vol. 38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