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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80 군사연구 제129집 점검하기 위하여 극동 순시차 하얼빈 행차에 맞추어 짜인 것이다. 한편 이때는 국내에서도 군대해산 이래 의병의 항전지구가 전국적으로 넓혀지고 두만․압록강 너머의 서북간도와 연해주 의병의 국내진입작전도 전개되어 소위 그들 일본군의 ‘의병토벌’ 작전이 강행되어 무자비한 살육전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안 의사 는 후일, 공판정에서 ‘이토가 한국통감으로 내한한 이래 의병을 비롯한 애국인사 가 10만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정황을 감안하면 이등 과 코코프체프의 회담내용은 그 다음해 7월 4일 성사되는 만주와 몽골관련 조약 인〈러일협약〉과 8월 29일에 선포한〈한일병합조약〉을 주 의제로 예정하였을 것 이라는 논단이 가능하다. Ⅲ. 안중근의 하얼빈의거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는 국망을 목전에 두고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전쟁(獨立 戰爭)의 의기(義旗)’를 든 데서 시작되었다. 1907년 8월 젊은 안 의사는 구국결의 를 다지며 회령(會寧)에서 두만강을 건너 먼저 북간도에 망명하였다. 처음 3개월 동안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그곳에 국권회복의 터전 을 잡고자 하였으나 이미 일제침략의 전위조직인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여의치 못하였다. 안 의사는 그해 10월 중순 연해주로 넘어가 엔치아(煙秋)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먼저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을 맡으면서 항일독립운동의 큰 경륜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조국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연해주 각지 한인마을을 순회하며 애국계몽활동을 벌였다. 한인사회의 교육과 실업의 발달을 도모하고 항일투쟁을 위한 민심 단합을 목표로 한 계몽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 의사는 한인 의 집단 거주지인 연추․수청(水淸)․추풍(秋風)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하바로프 스크 이북의 흑룡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한인 촌락을 전전하며 갖은 위험 을 무릅쓰고 유세하였다. 이어 안 의사는 국외 의병대열에 참여해 조국 독립전쟁을 결행하였다. 현재 크 라스키노라 부르는 엔치아(煙秋)는 항일의병의 기지로 유명한 곳이다. 안 의사와 그의 동지들은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국내진공작전을 비롯한 처절한 독립전쟁을 벌였다.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연추를 중심으로 한 국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