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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79 보고만 있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국진출을 노리던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3국 간섭을 통하여 일 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청에게 고스란히 반납하도록 외교압력을 가하여 일시 일본의 만주 침략을 좌절시켰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청의 의화단(義和團)란을 핑계 삼아 만주지역에 출병하면서 여순과 대련을 조차(租借)란 명목으로 차지하 고 그곳에 부동항의 여순군항을 건설하여 그들 극동 해군함대의 근거지를 삼고 그곳에서 대련․봉천․장춘을 거쳐 하얼빈에 이르는 동청철도의 남지선(南支線) 의 설치를 서둘렀다. 일본이 청일전쟁까지 치르면서 경연하려던 요동반도를 포함 하는 남만주 경영을 러시아는 3국 간섭을 계기로 기선을 잡은 것이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요동반도를 특히 대련의 도시건설과 여순군항 경영에 골몰하였다. 3국 간섭 후 러시아의 이와 같은 남하정책 추진에 부심하던 일본은 러시아와 의 전쟁준비를 서둘러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인천(仁川) 앞바다에 서의 해전에서 승리의 서전을 거둔 일본은 수만의 일본 육해군병을 희생하면서 격전의 여순공방전을 감행하여 1905년 정초에는 난공불락의 여순군항을 함락시키 고 이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한해협과 독도어간에서 격하여 승세를 굳혔다. 그해 9월에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 하에 포츠머스조약을 맺어 러․일강 화를 이룩하면서 요동반도와 여순항을 다시 일본이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은 그 곳에 가장 정예군단인 관동군(關東軍)을 기간으로 관동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만경 략(韓滿經略)에 분주하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를 대신하여 여순군항 건설과 동청 청도의 남지선 예정지에 남만주철도 부설에 박차를 가하여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삼았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의 표적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곳에 출현 하게 된 시기는 그동안 여순군항 건설도 마치고 남만주철도도 여순, 대련에서 시 작하여 심양․장춘을 거쳐 거의 하얼빈 인근까지 넓혀져 일본의 만주 경영이 실 적을 올리던 무렵이었다. 더욱이 청과 야합하여 그를 합법화한 한․청간에 영유 권(領有權) 분쟁지이며 왕조말 이래 한국인의 이주개척지인 간도(間島)를 중국령 으로 인정하여 주는 대가로 만주경영에 절실한 남만철도(南滿鐵道) 부설권을 비 롯한 무순탄광 등 탄철(炭鐵) 개발권을 획득하는〈만주5건에 관한 협약〉을 성사 시킨 직후였다. 마침 러시아의 대장성대신 코코프체프(B.H. Kokobhob)가 블라디 보스토크를 중심한 러시아의 극동지방의 방비와 동청철도 이남의 만주경영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