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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순국 100주년의 성찰 74 군사연구 제129집 (問答四)〉는 제명만 달고 복고(腹稿)로만 간직한 채 순국하였다. 5) 또한 안 의사 는 이보다 앞선 의거직후 한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의 이념을 결집한〈안응칠 소희(安應七所懷)〉와 이토의 침략행적(侵略行績)을 구체적으로 열거한〈이토 히 로부미 죄악(伊藤博文罪惡)〉을 기술하여 신문관에게 전하였다. 6) 그리고 안 의사 는 생사(生死)에 임한 감방에서〈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와〈위국 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비롯한 신품(神品)과 같은 유묵(遺墨)을 현재 알려진 것만도 59여폭을 썼다. 7) 여기에는 하나같이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의 단지장인(斷指掌印)이 찍혀 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취지가 서 려 있는 것이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이와 같은 이토를 포살한 행적과 그를 이은 여순(旅 順)옥중 투쟁을 묶어서 성찰해야 될 과제이다. 그동안 안 의사의 연구는 하얼빈 역두행적에 역점을 두고 전후 5개월에 걸친 옥중투쟁은 소홀히 검토된 면도 없지 않다. 안 의사가 이토(伊藤)를 한국침략의 원흉으로 몰아 응징한 의열투쟁(義烈鬪 爭)의 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한국독립의 회복과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한 수단이고, 중요계기를 삼으려는 면이 보다 부각되는 것이다. 때문에 안 의사는 옥 중투쟁을 통하여 그의 큰 꿈인《동양평화론》을 주장하여 그를 구현시키고자 사 신성인(捨身成仁)한 ‘평화주의(平和主義)의 소명자(所命者)’임을 자임(自任)한 것 이다. 그러나 안 의사 자신의 유고는 순국 즉시 일제에 압수되어 나라 잃은 한국민 5)《안응칠역사》를 이어 저술된 미완성의〈東洋平和論〉은 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七條淸美文書 중《安重根傳記及論說》에 필사본이 合綴된 것이 전래되고 있다. ; 윤병석, 〈안중근의사 전기의 종합적 검토〉《韓國近現代史硏究》9,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8. 윤병석,〈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과 그 사상〉《안중근의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 제3회 국 제학술회의보고서, 안중근의사기념관, 1993. 6) 앞의『大韓國人 安重根 - 사진과 유묵』, 125쪽, ; 국가보훈처 편《亞洲第一義倈安重根》1, 1995, 94~96쪽. 7) 안 의사의 遺墨은 보물로 지정된 〈國家安危勞心焦思〉와 〈爲國獻身軍人本分〉등 26점을 포함하여 한․중․일에서 현재까지 필자가 실물 혹은 사진본으로 확인한 것이 59점이고 그밖에〈天地飜覆志士慨嘆 大廈將傾一木難支〉와 같이 유묵의 내용은 알 수 있으나 유묵으 로는 확인 안 된 것이 4점이다. 윤병석,〈安重根의사의 著述과 遺墨〉《안중근연구의 기초》, 안 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 경인문화사, 89~93쪽까지에는 56점이었으나 그 후〈謀事在人 成事在天〉와〈登高自卑行遠自邇〉〈人無遠慮必有近憂〉이 알려져 59점을 헤아리게 되 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