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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55 으로 1909년 2월 15일 연추한인일심회(煙秋韓人一心會)를 발기하였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하였지만 일제는 그가 연추한인일심회를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였 다. 46) 이는 그의 지위가 확고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추한인일심회의 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지만 안중근은 1909년 2월 23일 박춘성ㆍ한기수 등과 거병을 계획하고 최재형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의병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한 최재형의 거부로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연추한인일심회의 부진와 거병계획의 실패는 동지간의 절대적인 단합의 필요 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목숨을 함께 할 동지 11명과 더불어 1909년 3월 2일 연추하리에서 정천동맹(正天同盟)을 조직하였다. 일명 단 지동맹이라고 불리는 정천동맹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구현하라는 천명 이라는 그의 사상성을 반영한 단체명이었다. 특히 그의 손가락은 대일투쟁의 정 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47) 안중근은 이후 부일세력의 척결에 진력하면서 48)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거병기 회를 엿보았다. 국내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최재형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최재형은 이를 거절하였다. 진퇴양란에 빠진 안중근은 방책을 강구하기 위해 결국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 가기로 결정하였다. 1909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이토의 방만소식을 듣고서 49) 너무나 기쁜 나머지 환호를 지르며 1909년 을사늑약 때부 터 꿈꾸던 이토처단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그리하여 거사동지로 평소 강 개담을 나누던 우덕순을 정하고, 거사자금을 의병장 이석산에게서 강제로 100루 불을 빌리는 등 거사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50) 46) 국사편찬위원회,「安應七에 관한 情報 件」,『통감부문서』7권 16쪽. 47) 이는 다음에서 알 수 있다. “排日徒는 神을 崇敬하듯이 하고 새로 조선에서 오는 자는 일부 러 와서 禮拜를 請하는 者 조차 있다. 今以後 獨立旗를 들고 大義를 주창하여 煽動하면 愚 民은 다소 動搖할지도 모른다고 盲從하는 者 있을 지도 모른다고 云云한다”(일본 외무성 외 교사료관, 「六月二十一日以降木藤通譯官カ嚴仁燮ヨリ得タル情報」, 在西比比利亞 第3卷). 48) 신운용,「안중근 세력형성과 정천동맹」,『안중근과 한국근대사』, 169〜170쪽. 49) 이토와 러시아 장상 까깝쵸프 회담의 배경과 목적에 대해서는 신운용,「안중근의거의 국제 정치적 배경에 관한 연구」,『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참조. 50) 그동안 안중근의거는 대동공보사와 합작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으나, 신운용은 합작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면서 우덕순과 함께한 단독설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였다(신운용, 「안중근의거와 대동공보사와의 관계에 대한 재검토」, 『안중근의사하얼빈의거 1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