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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연구 34 군사연구 제129집 주축으로 편성된 동의회 의병부대에서 우영장(右營將)으로 활약하였다. 동의회 의병은 최고 지휘관인 도영장(都營將)이 좌, 우영장 양익(兩翼)을 거느 리는 체제를 기간(基幹)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양익 편제는 국내진공작전 때에도 그대로 준용되었다. 그러므로 도영장 전제익(全濟益)을 필두로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이 동의회 의병에서 가장 핵심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우영장 안중근은 동의군의 한 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2백 명 규모로 추산되는 휘하 의병을 이끌고 1908년 7월 7일 포시에트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 부대는 경흥군 홍의동(洪儀洞), 신아산(新阿山) 등지에서 승리한 뒤 도처에서 일본군과 혈투를 벌이면서 회령군 영산(靈山)까지 진출하였 다. 하지만 이곳에서 7월 21일 일본군과 혈투를 벌인 끝에 전력의 열세로 참패한 뒤 신산고초 끝에 연해주로 귀환하였다. 영산전투 패전 후 1908년 8월 말 혹은 9월 초 연해주로 귀환한 안중근은 3개 월에 걸쳐 현지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인심단결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이처럼 한인사회를 역방한 뒤 연추로 돌아온 안중근은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즉 이 결사는 의병투쟁의 여건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안중근이 의병결사인 동의회 의 취지와 정신을 계승하여 인심단합을 통해 조국독립과 동양평화에 더욱 매진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였던 셈이었다. 동의단지회는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현존하는 혈서 엽서에 기록된 결성일 자인 1909년 2월 7일이 음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날짜를 양력으 로 환산하면 2월 26일이 된다. 현재로서는 이 날을 동의단지회가 결성된 일자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안중근이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장소로 진술한 하리(下里)는 그가 의병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주 회합을 가졌던 활동 근거지였던 것 같다. 안중근 의 진술에 의거하는 한, 하리는 연해주 연추에서 간도 혼춘으로 통하는 가도상에 있는 5~6호의 작은 마을이고, 그곳에 있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여 관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동의단지회는 맹주 안중근이 나머지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결성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진술, 공판과정에서 기록된 명단 외에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에 그 실명을 확인하는 작업이 지난(至難)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