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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참전수기 270 군사연구 제129집 행동이 막연하여 서로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데 산 아래쪽 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들렸다. 혹시 적이 아닌가 하고 긴장되어 주시하니 대여섯 명의 인부가 보급품을 지고 일등중사 보급계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디로 가 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대대 OP로 간다고 하였다. 가마니에 지고 가는 것이 쌀 뿐인 것 같다. 뒤를 따라 오르니 허기가 져서 한발 한발이 고역이다. 대대 OP는 근거리에 있었다. 소대장님과 먼저 온 전우들이 우리를 반갑게 손을 잡고 무사히 찾아 왔구나 라는 위로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아 목이 매여 말문이 막혔다. 소대장님도 울고 나도 울었다. 중대장님께 인사하니 역시 같았다. 보급계가 반합 속 뚜껑으로 쌀 1뚜껑을 지급하였으나 물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먼저 온 전우가 음지 바위 밑에 눈이 있다하기에 반합에 눈을 떠다가 쌀을 씻고 밥을 지었더니 밥 반 죽 반이다. 그나마 나의 반합 속 뚜껑에 된장이 조금 남아있어 된장을 찬으로 허기를 달랬다. 분산되었던 대원들이 두 세 사람씩 종일 모여 들었다. 기쁨도 함께 하였으나 패잔병이라 사기가 떨어져 말이 아니였다. 우리 3대대는 우리 사단 제13연대와 교대하고 하산하여 절 앞 도로에 대기된 트럭으로 양양천 남쪽으로 이동하여 야산에 호를 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전선에서는 하루 밤을 자도 개인호를 파고 경계를 하며 다음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사상자 없던 중대원 130명이 설악산 전투에서 약 4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같다. Ⅱ. 오대산 전투(중공군 5월 총공격) 설악산 전투 후 양양천 남쪽 야산에서 1주일 대기하다가 우리10중대는 출동 명령이 내렸다. 아침 일찍 식량과 탄약을 보급받고 출동 준비하여 트럭 편으로 강릉으로 이동하여 해변 송림에서 야영하고 다시 출동 준비하여 트럭 편으로 대 관령고개 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오르니 피난민들이 짐을 지고, 이고, 애기는 업고, 걸리고 줄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