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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222 군사연구 제129집 이러한 도르곤의 행동은 강경책으로 일관했던 청 태종에 비해서도 심했기 때 문에 효종은 즉위 이후 군사력 강화에 중점을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효종 원년 (1649) 12월 도르곤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제거되자 14세의 어린 세조가 親征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청의 對조선정책은 온건책으로 조금씩 변하였는데, 이 는 명이 멸망하고 청의 정국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정세 또한 효종이 친청파의 대부인 김자점과 정명수 무리를 점차 제거하며 안정 되어 갔다. 효종은 즉위 3년째인 1652년부터 본격적으로 군사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물론 효종은 즉위한 직후부터 군사력 강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청의 간섭과 친청 파의 감시로 인해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효종이 실시한 군사력 강 화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9) 우선 중앙군의 강화부터 살펴보겠다. 효종은 유사시 서울의 保障處 역할을 하던 남한산성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형 조판서 이시방을 守禦使로 임명하여 남한산성 방어를 담당하는 守禦廳을 개혁하 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전략은 전투가 발발하여 국왕이 도성을 떠나야 할 경우 국왕은 훈련도감 군사와 어영청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고, 세 자는 총융군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을 거점으로 강화도에 대한 적 의 압박을 둔화시키면서 각 도에서 집결한 군사(勤王兵)와 함께 대적하는 것이었 다. 즉 남한산성은 수도 서울 다음가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어청은 설치 초기에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남․북방의 외적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기도 일원의 군사로만 편제되지 않고 적의 침입로가 될 수 있는 충청도 의 군사까지도 편입시켜 산성을 방어하였다. 하지만 산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군사가 유사시 제때에 동원되지 못하고 충청도의 군사가 대부분 남한산성 방어에 투입되면서 忠淸兵使 예하에 군병이 존재하지 않아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효종은 남한산성을 방어하고 있던 충청도 군사를 경기도의 군 사와 바꾸고 남한산성 내의 광주ㆍ양주ㆍ죽산ㆍ원주의 4營 군사를 통합시켰다. 19) 조선시대의 軍은 국왕을 호위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중앙군과 실질적인 전투를 담당하며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지방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즉 중앙군이 호위를 주로 하여 전쟁동원에 적당하지 않았으므로 전투는 지방군이 담당 하였다(김우철,『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0, 10쪽). 물론 이러한 구분이 다소 도식적이지만 지방군은 國防이라는 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