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page

효종의 북벌정책과 나선정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검토 216 군사연구 제129집 Ⅰ. 머 리 말 조선시대 수많은 전쟁 중에서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 전쟁은 宣祖代의 임진왜란(1592)과 仁祖代의 병자호란(1636)일 것이다. 임진왜란은 한반도 전체가 전장화되는 대규모의 전면전이 벌어진 전쟁이었고, 병자호란은 조선의 임금이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삼전도(三田渡 : 현 서울시 송파구 위치)에서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한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조선과 청은 이듬해인 인조 15년(1637) 丁丑約條를 체결하 였고 1) 인조의 두 아들인 昭顯世子(1612∼1645)와 鳳林大君은 위 약조의 3번째 조 항에 의해 청의 심양에서 8년간의 인질생활을 하였다. 이후 청은 명을 멸망시키 면서 중원장악에 대한 자신감이 점점 커졌고, 더 이상 조선이 反淸政策을 지속하 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청은 인조 23년(1645) 2월에 소현세자를, 동년 5월 에 봉림대군을 각각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8년간의 인질생활을 통해 청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는 조선의 국력으로 청나라에 대항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현실에 바탕을 둔 ‘親淸的’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2) 이러한 세자의 인식은 ‘崇明反淸’을 주장하며 仁祖反正(1623)을 통해 왕위에 오 른 인조의 정통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인조의 입장에서는 절대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때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3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 였고, 3) 인조는 봉림대군이 귀국한 후 대신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이 죽고 나면 어린 임금(世孫)으로서는 임금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大君들 가운데서 새로운 왕을 선택하겠다고 하여4) 세손 대신에 봉림대군을 1) 정축약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청을 君臣의 예로 행할 것 ②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왕래를 끊으며 명에서 받은 瀋命冊封을 내놓을 것 ③ 두 왕자와 여러 대신의 아들을 심양 에 인질로 보낼 것 ④ 명의 舊例대로 聖節使 등의 사절을 보낼 것 ⑤ 명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할 때 기일을 어기지 말 것 ⑥ 內外諸臣과 혼인을 맺을 것 ⑦ 城垣을 수리 하지 말 것 ⑧ 정묘년에 정한 歲幣를 보낼 것(『인조실록』권34, 15년 1월 무진). 2) 우인수,「조선 효종대 북벌정책과 산림」,『역사교육논집』15, 역사교육학회, 1990. 3)『인조실록』권46, 23년 6월 무인.;소현세자의 시신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인조는 사인을 확인하기는커녕 서둘러 입관시키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왕세자의 喪에서 입어야 하는 三年服 대신 朞年服(1년)을 착용하였으며 소현세자를 대신할 왕세손을 정하 자는 조정의 논의도 거부하였다(신항수,「소현세자는 왜 급살되었나」,『내일을 여는 역 사』10, 내일을 여는 역사, 2002). 4)『인조실록』권46, 23년 윤6월 임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