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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29집 13 의병은 총 1천 명 안팎의 규모로 추정된다. 이때 결행된 국내진공작전은 최재형 세력이 주축이 된 동의군(同義軍, 동의회 의병)과 이범윤 세력의 창의군(倡義軍, 창의회 의병)이 모두 동원되어 수차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10) 안중근은 동의군의 우영장으로 한 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 그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포시에트를 떠나 두만강을 건넌 것은 1908년 7월 7일이 었다. 11) 같은 시기에 두만강을 건넜던 우덕순은 도강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1908년 무신( 戊申 )이었습니다. 나는 의병 12소대를, 안( 安 , 안중근-필자주)은 4소 대를 인솔하고 6월 초 10일에 국경을 넘어 조선 땅에 들어섰습니다. 50인을 한 소대로 편성하였지요. 위의 인용문을 통해 볼 때, 우덕순은 동의군의 우영장 안중근과 동시에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안중근은 휘하에 1개 소대에 50명씩 4개 소대, 즉 2백 명을 인솔하였으며, 우덕순은 12개 소대, 6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 다는 것이다. 일제 정보기록에 의거해 볼 때, 우덕순은 안중근과 계통을 달리하던 창의군의 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12) 안중근이 거느린 의병부대는 도강 후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에서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13) 홍의동은 경흥읍에서 남동쪽으로 10여 Km 떨어진 두만강변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들은 곧 경흥으로부터 출동한 일본군과 첫 전투를 벌여 일본군 척 후보병 상등병 이하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4) 홍의동을 습격한 의병은 곧 북상하였다. 경흥 경찰분서에서는 분서장 이하 순 사 7명이 의병 출현 소식을 듣고 8일 경흥읍 남쪽 두만강 대안의 고읍동(古邑洞) 10) 의병단체인 창의회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 296~298쪽 참조. 11)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 319쪽; 계봉우, 「만고의사 안중근전」10, 권업신문 1914년 8월 29일자; 윤병석 譯編, 안중근전기전집 , 국가보훈처, 1999, 527쪽. 우덕순은 해방 직후 남긴 회고록에서 도강일자를 7월 6일(음 6월 10일)로 기억하고 있 는데(「禹德淳先生의 懷顧談」;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 619쪽), 이는 도강을 준비하고 결행하기까지 연속된 과정 일체를 도강으로 설정했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곧 6~7일 간에 도강이 연속적으로 준비되고 결행된 것으로 보인다. 1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 Ⅵ, 2003, 15~23쪽. 13) 暴徒에 關한 編冊 , 「慶興署長發 電報」(1908.7.9)ㆍ「號外」(1908. 7. 1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11 , 450ㆍ456쪽) 1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7 , 235쪽;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자료11 , 45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