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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 강점기에 국민계몽과 나라독립에 앞장선 교육가요 사상가요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롱섬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서당교육을 받고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서 신학문을 닦고 그리스도교에 입교, 평생 그 가르침을 토대로 인격을 쌓으며 활동하다. 독립협회에 참여, 평양지부를 발기하고 감동적인 연설로 민족의 자각을 호소하며 생활개혁과 나라사랑 마음을 북돋우니 저 쾌재정 연설은 이 때다. 1899년 구국의 길이 교육에 있음을 깨달아 최초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탄포리교회를 세우다. 1902년 이혜련과 결혼, 곧 부부동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태평양 항해 중 도산이란 호를 가지다. 상항과 남가주에서 고학, 동포를 격려하며 한인친목회 공립협회를 차례로 설립하고 공립신보를 창간하니 뒷날 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의 전신이다. 1907년 나라의 위기를 절감하고 귀국, 애국동지들을 망라하여 신민회를 창건하고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태극서관 마산동자기회사를 설립하며 독립운동기지개척을 위해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니 이는 학문연마 교육수련 실업부강이 국권회복의 토대임을 직시함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로 일본 헌병대에 구금, 2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나라 기울어짐을 통분하며 그 이듬해 망명길에 오르다. 청도회담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 설립을 논의하고 1910년 8월 연해주에 도착, 1년간 민족운동을 이끌다가 러시아를 횡단, 베를린 런던을 거쳐 미국에 도착하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4개 지방총회 대표회의에서 중앙총회가 발기되어 대한제국 이후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부역할을 사실상 감당하다. 이듬해 인재양성과 동맹수련을 목표로 흥사단을 창립하고 이어서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무실역행 민력증강을 더욱 강구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독립전쟁 준비를 호소하며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외교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자신은 상해로 향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 정부의 기틀을 마련하고 세 갈래의 정부를 통합하며 만주 연해주의 무장세력과도 기맥을 통하다. 임시정부가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노동국총판을 사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상해 인성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통의군 시사책진회 한국노병회 건립에도 참여하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부의장에 선임, 독립운동계의 통일운동을 모색했으나 회의 결렬 뒤 이상촌 건설을 위해 중국관내와 만주를 시찰하고 독립군 대표들과 숙의하다. 1924년 3월 남경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흥사단원동대회를 개최한 후 이해 말 미국에 돌아가 동포들을 격려하다. 1926년 하와이 호주를 거쳐 4월 홍콩에 도착,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요청을 사양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창립하다. 그 후 남경 상해 북경 및 만주 일대를 순회하며 한국유일독립당 결성을 호소하고 이상촌 후보지를 탐색하다 길림에서 한 때 중국 경찰에 체포되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 대공주의에 따른 당강령을 작성하고 독립운동전선통일을 추진하며 경제합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