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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臨政) 요인(要人) 묘(墓) TOMBS OF KOREAN PROVISIONAL GOVERMENT LEADERS 이곳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要人)으로 활약한 임정 주석(主席) 이동녕(李東寧), 군무부장 조성환(曺成), 비서부장(祕書部長) 차리석(車利錫) 선생의 묘역(墓域)이다. 이동녕(1869~1940) 선생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독립협회(獨立協會) 활동과 언론·계몽운동, YMCA 운동 및 을사늑약(乙巳勒約)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1906년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는 한편 언론·교육활동을 통해 항일구국운동에 나섰다. 1910년 서간도(西間島)에 망명하여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興武武官學校)등을 설립하였다. 3·1운동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국국민당(韓國民黨)을 조직하는 한편 임정의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중국 치장(綦江)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1948년 김구 선생이 주선하여 사회장으로 봉환(奉還)하였다. 조성환(1875~1948)선생은 서울 출신으로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부(軍部)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1912년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의 만주시찰 때에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차장(軍務次長)에 임명되었으며, 만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하면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임정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복군(光復軍) 창설과 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환국하여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8년 서거(逝去)하였다. 차리석(1881~1945)선생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신민회에 가입하였으며, '105인 사건(105人 事件)'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때 만세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에 참여하고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임시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임정이 존폐위기에 처했을 때 임정을 고수하여 1935년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서장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또한 한국독립당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興士團遠東臨時委員部) 단무(團務)를 총괄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환국을 준비하던 중, 중국 충칭(重慶)에서 세상을 떠났고, 1948년 김구 선생이 주선하여 사회장으로 봉환(奉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