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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白帆) 김구(金九) 선생의 묘(墓) / THE TOMB OF KIM KOO 이 곳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 주석(主席) 김구 선생(1876~1949)의 묘역(墓域)이다.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학을 배웠고, 조선왕조의 부패에 항거하여 동학(東學)운동에 참여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스치다(土田讓亮)를 의살(義殺)하고 이 나라에 충절(忠節) 있음을 만천하(滿天下)에 알렸으며, 이로 인해 인천(仁川) 감옥에 투옥되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약(勒約)되자 그 철폐를 위해 투쟁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국권 수호에 앞장섰으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교육·강연 등의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는 안악사건(安岳事件)을 꾸며 다시 투옥, 서대문감옥과 인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 (上海)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警務局長)과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령(國務) 등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으며,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통해 임정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니,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기면서 27년간 조국광복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김구 선생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고 좌우합작(左右合作)운동에 노력하였으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武裝鬪爭)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環國)하여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소(美·蘇) 등 강대국의 한국 분할정책에 맞섰다.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을 위하여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것이 곧 민족분열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가져 올 것임을 예견하고, 이를 막아 자주적인 통일국가(統一國家)를 세우고자 남북협상(南北協商)에 앞장섰다. 남북에서 분단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민족통일·자주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흉한(凶漢)에 의해 쓰러지니, 7월 5일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국민장(國民葬)으로 이곳에 봉안(奉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