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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5px"> 저곳은 또 군부대와의 사전협의가 있어야 들어갈수 있다는것이 아쉽다. 아래글은 <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530621 target=_blank>중앙일보에 소개된 관련 기사의 일부이다</a>. 한번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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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급서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학질 환자에게 사흘 동안 침만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세자 사망 다음날인 인조 23년(1645) 4월 27일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는 “세자께서 한전(寒戰:오한)이 난 이후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며 이형익 등의 국문을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인조는 이형익 보호를 위해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의 봉입을 금지시켰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이 대사헌으로서 계속 이형익의 처형을 주청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다. 세자 죽음의 배후가 차차 드러났다. 인조는 관에 재궁(梓宮:임금의 관)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서인에게 쓰는 널 구(柩)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자 대신 묘(墓)자를 썼다. 장남의 상사(喪事) 때는 부모도 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영상 김류(金류), 좌상 홍서봉(洪瑞鳳) 등은 기년복(일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인조는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실시해 12일간으로 정했다가 7일 만에 끝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세자시강원 필선(弼善:벼슬 이름) 안시현(安時賢)은 세자 사부(師傅)가 아무도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시현은 인조 23년 5월 6일 세자의 장남인 원손(元孫) 이석철(李石鐵)을 “세손(世孫)으로 정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종법(宗法)대로 장손을 인조의 후사로 삼으라는 주청이었다. 인조는 “이런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꾸짖고 쫓아냈다. 이상 조짐이 계속되었다. 인조는 술관(術官:풍수가)들이 영릉(英陵:세종과 부인의 능) 동쪽이 길지(吉地)라고 천거했지만 인조는 ‘길이 멀고 폐단이 크다’며 효릉(孝陵:인종과 부인의 능) 등성이로 결정했다. 이의를 제기한 술관 장진한(張鎭漢)은 국문에 처했다.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장례일이 자오(子午)가 대충(對沖:방위가 서로 마주침)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고 불평했다. 정북(正北:자)과 정남(正南:오)이 맞서는 날 장례를 치르면 원손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짐을 간파한 안시현은 5월 27일 상소를 올려 ‘예관(禮官)이 원손을 세손으로 삼자고 주청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6월 2일 인조는 조정의 주요 대신을 모두 불러 속셈을 털어놓았다. “나는 숙질(宿疾)이 이따금 심해지는데 원손은 저렇게 미약하다. 금일의 형세를 보건대 어린아이가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장남이 사망할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종법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신하도 모두 원손의 사위(嗣位)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청나라에 물든 소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지만 산림(山林) 송준길(宋浚吉)이 ‘억만 겨레 신민의 희망이 원손에게 있다’며 척화파 김상헌에게 원손의 보도(輔導)를 맡기자고 주장한 것처럼 원손은 잘 교육시키면 반정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인조실록』은 신하들이 원손 교체에 반대하자 “임금의 분노가 심했으므로 좌우에서 다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영의정 김류는 “만약 상(上: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의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발 물러섰다. 인조는 당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영중추부사 심열(沈悅)은 “국본(國本:세자)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당일 원손은 교체되고 차자(次子) 봉림대군이 후사로 결정되었다. 원손은 졸지에 차기 임금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인조는 재위 23년(1645) 8월 강빈의 궁녀들을 내옥(內獄)에 가두고 국문시켰다. 저주했다는 혐의였다. 인형 따위에 바늘 등을 꽂아 저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일이었다. 인조의 목적은 저주의 배후가 강빈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인조 23년(1645) 8월과 9월 원손의 보모(保姆)였던 상궁 최씨와 강빈의 궁녀 계향(戒香)·계환(戒還) 등은 심한 고문 끝에 강빈의 이름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이 저주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죽었으나 인조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24년(1646) 1월 인조는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고 주장하며 정렬(貞烈) 등 강빈의 다섯 궁녀와 어주(御廚:주방) 나인 세 명을 또 국문했다. 『인조실록』이 “임금이 궁중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겨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형세였다(24년 1월 3일)”고 쓴 것처럼 인조의 억지였다. 인조는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가두고 문에 구멍을 뚫어 물과 음식을 주게 했다. 궁녀 난옥(難玉)은 고문사했고 강빈이 신임하던 정렬(貞烈)·유덕(有德)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살을 지지는 것)을 받고 죽었다. 아무도 강빈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재위 24년(1646) 2월 3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억지를 부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고 몰래 도모해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왕비 복장)를 마련해 놓고 참람하게 내전(內殿)이라 칭호했다…이런 짓을 차마 하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는가?”(『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수종자들이 저들(彼人:청인)이 보고 들으라고 세자를 동전(東殿), 세자빈을 빈전(嬪殿)이라 칭한 것이지 세자와 빈이 자칭한 것은 아니라고 부기했다. 그러나 인조는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는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하루도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는 율문을 상고해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했다. 강빈을 사형시키라는 뜻인데 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시역(弑逆)이 어떤 죄인데 짐작만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한 것처럼 무리한 요구였다. 인조는 강빈의 사형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성문 밖으로 내쫓고 병조판서를 숙직시키며 경호를 엄하게 하게 했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은 “강빈을 폐할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강빈을 죽이시려면 신을 먼저 죽이신 연후에야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다가 귀양 갔다. 인조는 24년(1646) 2월 29일 강빈의 두 오빠 강문명(姜文明)·강문성(姜文星)을 장살(杖殺:곤장을 쳐 죽임)시키고 3월 15일에는 강빈을 덮개 씌운 검은 가마(屋黑轎)를 이용해 사저로 내쫓고 당일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인조실록』은 세자빈이 쫓겨날 때 “길가에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했다”며 “중외(中外)의 민심이 모두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빈을 죽인 인조는 과거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강빈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고문자의 의도대로 강빈의 이름을 댔고 인조는 안사돈인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어린 석철은 동생들과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사관(史官)은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소현세자의 영혼이 어두운 지하에서 어찌 원통해하지 않겠는가”(25년 8월 1일)라고 개탄했다. 사관의 예견대로 석철은 다음해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고 말았다. 둘째 석린도 석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비난에 직면한 인조는 나인 옥진(玉眞)에게 책임을 지워 고문해 죽여 버렸다.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의 끝은 가족 참살로 끝을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