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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경궁 (儲慶宮) 선조 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김씨(仁嬪金氏) 순강원(順康園)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榛接邑) 내각리(內閣里) 150 대빈궁 (大嬪宮) 숙종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 張氏) 대빈묘(大嬪墓)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 육상궁 (毓祥宮) 숙종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 소령원 (昭寧園) 경기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267 연호궁 (延祐宮) 영조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정빈이씨(靖嬪李氏) 수길원(綏吉園) 경기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 266 선희궁 (宣禧宮) 영조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수경원(綏慶園)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 경우궁 (景祐宮) 정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 휘경원 (徽慶園)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 덕안궁 (德安宮) 고종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순헌귀비(純獻貴妃嚴氏) 영휘원(永徽園)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1824년(순조 24) 북부 양덕방(陽德坊:桂洞 전 휘문고교 교정)에 사당을 짓고, 그해 12월 궁호(宮號)를 경우궁이라 하여 위패를 모셨다. 1884년(고종 21) 10월 갑 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에 의하여, 경우궁에 일시 강제로 이어(移御)한 고종은 여기에서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戚臣)들이 참살당 하는 곤욕을 겪은 후, 이듬해인 1885년 경우궁을 인왕동(현 玉仁洞)에 옮겨 짓도록 명하였고, 국운이 기울어지고 일제의 세력이 궁중에 범람할 무렵인 1908년 (융희 2)에는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에 저경궁(儲慶宮:元宗의 생모궁)·대빈궁(大嬪宮:景宗의 생모궁)·연우 궁(延祐宮:眞宗의 생모궁)·선희궁(宣禧宮:사도세자의 생모궁)과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위패를 함께 봉향하여 6궁(六宮)이라 하였으며, 1929년 이은(李垠) 의 어머니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덕안궁(德安宮)을 합하여 7궁이 되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하면서 생모(生母)를 기리기 위해 묘를 지었는데, 지을 당시에는 숙빈묘라 이름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육상묘로 개칭하였으며, 1753년(영조 29)에는 육상궁으로 승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는 영조의 화상 두 폭을 봉안하였다. 1882년(고종 19) 8월 불이 나서 궁이 소실되자 이듬해 다시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1908년(융희 2) 7월 23일 예절이 번거로우면 본뜻을 잃는다는 황제의 조칙(詔勅)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궁들 을 합설(合設)하였다. 1903년(고종 40)에 건립되었다. 순헌황귀비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어머니로, 1897년에 영친왕을 낳으면서 귀인으로 책봉된 뒤, 1903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 았다.이 때부터 경운궁(慶運宮) 안의 명례궁(明禮宮) 터에 경선궁(慶善宮)을 세우고 이 곳에서 살다가 1911년 7월 사망한 뒤 이름을 덕안궁으로 고쳤다. 이후 1913년 지금의 태평로1가에 새로 궁을 짓고, 엄비의 묘우(廟宇)라 하여 궁 이름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1929년 7월 덕안궁을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 현재는 종 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육궁(六宮)이라 하다가 이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비로소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조선 제12대 왕 인조의 잠저(潛邸 :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곳). 남부 회현방 송현(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가)에 있었다. 이 궁은 인조의 생부인 원 종(元宗)의 구저로, 원래의 이름은 송현궁(松峴宮)이었다.1755년(영조 31) 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 김씨(敬惠裕德仁嬪金氏)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사하면 서 저경궁으로 고쳤다. 그 뒤 1908년(순종 2) 인빈의 신위를 궁정동 소재 육상궁(毓祥宮)에 이안하면서 1927년까지 건물이 남아 있다가, 그 자리에 경성치과의 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를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철거 때에 궁의 정문과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뒤뜰에 보존하였으 나, 1933년 정문을 철거하면서 하마비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비시키고, 왕후에까지 올랐다가 5년 만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후 1722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 로 추존되고, 동시에 대빈궁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신주가 봉안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낙원동에 해당하는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에 있었으나, 1870 년(고종 7) 육상궁으로 옮겼다. 이어 1887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가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목조건물로, 건축 기법은 칠궁의 다른 건물 과 비슷하지만, 기둥이 모두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어 좀더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진종을 왕으로 추존하면서 위패를 봉안한 궁호(宮號)를 연호궁이라 하고, 1778년(정조 2) 경복궁(景福宮)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세웠 다. 이곳은 육상궁(毓祥宮)과 가까운 곳으로, 1870년(고종 7) 육상궁 건물 안에 합사되어 오늘에 이른다.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인 1764년(영조 40)에 건립되었다. 원래 영빈 이씨의 시호(諡號)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쳤 다.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新橋洞)에 해당하는 한성(漢城)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었다. 이후 1870년(고종 7)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 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으로 옮겼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궁터(서울시유형문화재 32)가 신교동에 남아 있다.선희궁터:서울 종로구 신교동 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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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style="background-color:#ffffff;font-size:15px"> 임금을 낳고서도 후궁이기때문에 종묘(宗廟)들어가지 못하는 한많은 여인들의 사당이다. <br> <a href="javascript:void window.open('http://www.dmook.co.kr/gallery/view.asp?seq=112323&path=100105165057','','directories=no,menubar=no,location=no,toolbar=no,status=no');">임금과 대통령의 여인이 머문 곳, 종로구 궁정동(宮井洞)과 칠궁(七宮)</a>과 <br> <a href="javascript:void window.open('http://www.dmook.co.kr/gallery/view.asp?seq=75386&path=080312130648','','directories=no,menubar=no,location=no,toolbar=no,status=no');">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 종묘(宗廟)</a>도 같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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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의 순강원(順康園), 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휘경원 (徽慶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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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빈에서 왕비로, 다시 빈이 된 장희빈의 서오릉내 대빈묘(大嬪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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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소령원 (昭寧園)와 효장세자(진종)의 생모 정빈이씨의 수길원(綏吉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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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소령원 (昭寧園)와 효장세자(진종)의 생모 정빈이씨의 수길원(綏吉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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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의 순강원(順康園), 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휘경원 (徽慶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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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