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page


9page

철옹성같아만 보인던 이승만 정부가 60년 4월혁명으로 붕괴되자 피학살 유족들의 한은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었다. 거창지역 유족들은 60년5월11일 학살 당시 주민 선별작업을 맡았던 박영보 면장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다. 학살 현장에서 살기 위해 군경가족이라고 손든 주민들에게 박면장이 당신이 무슨 군경가족이냐'며 떠밀어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기에 유족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때 박면장이 사과를 거절하고 도망치자 흥분한 유족들은 그를 사로잡아 생화장시켜버렸다. 이사건 등으로 ‘거창사건’은 다시 부상하면서 은폐되어 있던 ‘산청·함양’의 양민학살 사건까지 불거져 나오게 되었다. 국회에서 전반적인 양민학살 규명이 이루어지는 중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다시 양민학살 문제는 수면하로 잠기고 신원면의 위령비는 군부의 완력으로 넘어뜨려졌다. 1961년에는 반국가단체라는 누명으로 유족회간부 17명이 투옥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고 어린이 묘는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다. 80년대 중반이후 거창·산청·함양 유족회는 긴 침묵의 살얼음판을 지나 다시 명예회복의 깃대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1996년 1월 국회는‘거창사건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