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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7 않았다면 최초부터 이 작전계획의 취약요인으로 분석되었던 오스트리아군으로부 터의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베네덱은 1시간 전에 또 다른 프로이센 주력군이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대다수 병력이 스비프발트에서 프란제키 제7사단과의 결사적인 전투5)로 병력을 전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형국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쾨니히그래츠 요새 근처에서 방 어진지를 편성하고, 지형적으로 요충지였던 클룸 언덕을 사수하기 위해 포병부대 를 배치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반격작전을 시도했지만 그동안 군사혁신을 통한 훈련과 정신무장 바탕위에 “바늘총”이라는 무기체계를 앞세운 프로이센군을 상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프로이센의 엘베군과 제2야전군이 각각 양익측에서 협공하여 오스트리아군의 퇴로를 차단할 무렵, 오스트리아군은 동쪽으로 급히 철 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어진지 배후에는 엘베강이라는 하천 장애물이 위치하 고 있어 철수간 엘베강에서 많은 익사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강을 건넜다 할지라 도 쾨니히그래츠 요새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집중되어 질식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주력을 완전 섬멸하는 계획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오스트리아와의 패권다툼에 서 프로이센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전투결과 오스트리아군은 포로 1만 9,800명과 전사상자 2만 4,400명이 발생 하여 전체 병력 중 22%에 해당되는 병력들이 손실을 입게 되지만, 프로이센군은 전사상자 9,172명으로 전체 병력 중 4%에 해당되는 병력들의 손실만을 기록했다. 이러한 전사상자 수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프로이센의 완전한 승리는 차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로도 이어져 독일 통일을 이룩하는 과업을 달성하게 된 반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군림해 온 오스트리아는 오스 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으로 변모하게 되고 이어 여러 국가들로 분리되는 불 행한 국운을 맞이하게 된다. 5) 프로이센의 왼쪽 진영인 스비프발트를 제7사단이 점령하게 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이 필사적으로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는데, 당시 프로이센군 제7사단은 19개 대대로써 오스트리아군의 50개 대대를 상대로 바늘총의 위력을 발휘하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만약, 스비프발트 진지를 오스트리아군이 탈환했다면 프로이센군의 왼쪽 측면 을 돌아 배후로 기동하여 퇴로를 위협할 수 있었고, 프로이센군의 좌익 제2야전군 공격 저지를 위해 병력을 전환시켜 방어할 수도 있었던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던 진지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