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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86 군사연구 제127집 오스트리아 국경선 너머 보헤미아로의 진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기동 및 부대배치로 6. 23일에 보헤미아 국경선을 넘었고, 3일 후에는 휘너바서, 포돌 등의 마을에서 오스트리아와 교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모하게 착검하고 돌진해 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프로이센군의 “바늘총” 위력이 십분 발휘되어 이에 대항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의 북군 사령관 르트비히 폰 베네덱은 개전 초 부터 상당수의 포로를 포함한 3만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그림 3-2> ▶ 장약을 점화시키기 위해 종이 카트리지를 뚫고 들어가서 탄알을 총신 밖으로 밀어내는 데 필요한 소규모 폭발을 일으키는 발사 장치가 바늘처럼 생겨 “바늘총”(아래)이라 불 리게 되었고, 이러한 바늘총은 오스트리아가 사용하고 있던 미니에 라이플 방식(위)에 비해 훨씬 빨리 장전함으로써 반응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군의 협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결국 군대를 후퇴 시켜 7. 1일 쾨니히그래츠의 요새 근처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7. 2일 프로이센군의 정찰결과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주력부대가 쾨니히그 래츠 요새 근처에서 방어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당시 제1야전군과 엘베 야전군 을 지휘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칼이 제2야전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명심에 사로 잡혀 단독으로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마침 프로이센군의 몰트케가 전신을 활 용한 지휘통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제1야전군이 배치된 현장에 위치하 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됨에 따라 급히 제2야전군을 이동시켜 오스트리아군의 취약한 오른쪽 측면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본격적인 몰트케의 “대포위작전”이 시행 되기 시작했다. 만약, 이 당시 몰트게의 이러한 적시적인 현장지휘가 이루어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