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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85 <그림 3-1> 쾨니히그래츠 전투 요도 * 출처 : 맥스 부트,「MADE IN WAR」(플래닛 미디어, 2007) 285쪽 나. 쾨니히그래츠 전투 당시 프로이센의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4)는 참모본부 제도 시스 템을 바탕으로 “적 앞에서 절대 군대를 분할하지 말라”는 나폴레옹의 전쟁 제1원 칙을 적용하는 대신 군대를 3개 야전군으로 나누어서, 제1야전군이 오스트리아 주력군을 대상으로 정면공격하면서 견제하는 동안 다른 2개 야전군인 엘베군과 제2야전군이 양익측에서 포위를 통해 퇴로차단 및 섬멸하는 일명, “대포위작전” 이라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러한 작전계획은 당시 산업기술이었던 전 신과 철도를 이용한 지휘통 제 및 보급지원, 신속한 기 동을 앞세워 3개 야전군을 신속히 공격지점으로 이동 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군이 증원되기 이전에 포위섬멸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반 면,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에 패한 후로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광범위한 개 혁을 단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쾨니히그래츠와 같은 오래된 요새에만 의존하게 되는 수세적인 방어개념을 채택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이러한 작전 계획을 바탕으로 1866년 6월 21일 오스트리아에 전 쟁을 선포한 이후 다음날 4) 이한홍, 군사연구총서 제48집,「독일의 장군참모제도」(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4) 64쪽, 1857년 소장으로서 참모본부 부장직을 맡아서 1888년까지 역임하였고, 1871년 원 수로 승진하였다. 그는 프로이센-독일의 참모본부 제도를 고도의 업무수행능력에 도달케 하여 독일제국에서 최고의 군사적 권위를 얻었으며, 특히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탁월한 작전 계획가로서, 그리고 작전지휘관으로서 명성이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