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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軍事革新으로 본 戰爭史 84 군사연구 제127집 Ⅲ. 군사혁신을 통해 승리했던 주요 전례분석 1. 프로이센의“쾨니히그래츠 전투” 가. 개 요 프로이센은 예나전투에서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패배2)한 이후 프랑스의 속국 으로 전락해 버리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게르하르트 폰 샤른 호르스트 장군3) 주도하에 1806년 이후부터 대대적인 군사혁신을 단행하였 다. 그 결과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군대를 재조직하고, 훈련시켜 나갔으며, 특히 산업혁명을 이용한 철도와 전신으로 기동력을 갖추고, 노리쇠 장전 라이플로 무 장함으로써 철저한 전쟁준비를 통해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그 실효성이 입증되 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이라는 좁은 영토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함께 두 나라가 지 배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1866년 6월 21일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따라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동쪽 50마일에 위치한 쾨니히그래츠의 요새 앞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프로이센이 유럽 강대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쾨니히 그래츠 전투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예나전투 패배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승리 의 원동력이 되었던 프로이센의 군사혁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2) 맥스 부트,「MADE IN WAR」(플래닛 미디어, 2007. 12) 250쪽, “나폴레옹 전쟁당시 작센 지방의 예나와 아우어슈태트에서 프로이센․작센 군대가 맞붙은 전투로서, 나폴레옹은 프 리드리히 2세 시대의 프로이센 구식 군대를 격파했다. 그 결과 1807년 7월 틸지트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의 영토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3) 이한홍, 군사연구총서 제48집,「독일의 장군참모제도」(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4) 49쪽, “프로이센군의 유명한 개혁가로서 프로이센의 국방장관이자 동시에 참모본부의 수 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810년 베를린에서 전쟁학교를 설립하였고 1807년부터 군사 개혁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예나전투의 참패 후 프로이센군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