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page

..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2 군사연구 제127집 했다. 그들은 독일군을 재빨리 격파한 뒤 곧바로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유럽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르베크 장군은 영국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는 소규모의 접전을 한 다음 재빨리 남쪽으로 후퇴했다. 스머츠 중장이 포르베 크 장군을 잡았다고 느꼈을 때마다 그는 몇 시간 앞서 움직여나가고 있었다. 그 는 영국군과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교전의 가능성을 열어둘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곧 잡을 듯했기 때문이었을까? 영국군은 계속 전진했다. 독일군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했지만 영국군의 수중에 빠지지는 않았다. 무엇엔가 홀린 듯 스 머츠 중장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숲을 지나 포르베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영국 군대의 보급선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길어졌다. 영국군들의 사기가 떨 어지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소규모 기습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독 일군을 쫓아가던 스머츠 중장의 군대는 함정에 빠져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정글에 갇혔다. 영국군은 전염병과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영국군은 자신들의 방법 으로 전투를 하지 못했다. 초원지대에서는 물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 이 일사병과 탈수로 죽어갔다. 유일하게 1917년 10월 마히와에서 대규모 접전을 치른 적이 있다. 그때도 영국군은 2,7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등 큰 패배를 당했다. 포르베크 장군은 4년 동안 영국 병력을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1918년 11월14일, 포르베크 장군은 포로로 잡은 영국군에게 독일이 패망했다 는 사실을 들었다. 포르베크 장군은 교전중지명령을 내리고, 영국과 종전협정을 체결했다. 포르베크 장군을 ‘불패의 독일 아프리카군단 사령관’, ‘동아프리카의 힌덴부르 크’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4년 동안 적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 력으로 싸웠으면서도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군수물자의 보급을 거의 받지 못했다. 전사에서 기적의 승리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 지 않은 것이다. 또 힌덴부르크 장군16)처럼 전쟁터를 직접 돌아보고 지형을 익히 고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런 것이 후일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 음은 물론이다. 16) 1차 세계 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독일의 장군이다. 퇴역한 다음에 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탄넨베르크 소택지를 장화를 신고 포를 끌면서 기동로를 일일이 답사 분석한 장군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