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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71 영국군은 독일군에 비해 많은 병력이 있었기에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 었다. 충분한 사전 정보로 대비했거나, 적절한 함포 사격 지원이 이루어졌거나, 구르카 용병들이 탕가 시내 세관을 점령했을 때 집중적인 전투지원이 이루어졌다 면 혹 전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장에서 떠나 배위에서 지휘한 영국 의 에이트켄 소장은 전장의 실시간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방책이 실기(失機)하고 만 것이다. 이에 반해 독일의 포르베크는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방에서 상황을 파악하면서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누가 이길 확률이 높은 것인가가 환히 보이는 전투였다. 한편 탕가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킬리만자로지역에서도 영국군의 공격이 있었 다. 케냐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독일부대를 공격했다. 당시 독일군은 독일인 86명 과 원주민으로 이루어진 1개 중대와 아스카리스 3개 중대 등 아프리카인 600명으 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공격한 영국군은 1,500여 명에 달했다. 인도 병사들 은 용감하게 싸우며 독일군 기관총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요란한 사격 때문에 보급품을 나르던 노새들이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노새가 달아나자 영국군에 게 남은 것은 수통 속의 물뿐이었다. 탄약이며 식량을 잃어버린 영국군은 그날 밤에 철수했다. 이 지역에서의 전투에서도 독일군이 승리한 것이다. 포르베크 장군은 어느 전쟁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을 연출했다. 승리한 이후 그 는 브랜디를 들고 영국군의 진영에 찾아가 같이 술을 마시며 위로했다. 또 전투 에 대해 토론하고 전략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부상자에 대한 치료도 같이 할 정도였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Ⅵ. 탕가전투 이후의 동아프리카 전투 탕가전투의 패배소식이 영국에 전해지자 영국국민들은 분노했다. 영국은 제2차 보어전쟁의 영웅 잔 스머츠 중장15)을 동아프리카로 파견했다. 스머츠 중장은 1916년 3월,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군을 잡기 위해 4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를 바탕으로 스머츠 중장은 속전속결로 승리를 쟁취하려 15) 남아프리카연방 정치가. 남아프리카연방이 성립되자 국방장관·재무장관 등을 역임하고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동아프리카 군사령관, 영국 내각 각료를 지냈으며 전후에는 국제연 맹 창립에 공헌하고, 남아연방 수상·법무 장관 등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남아 연방의 수상·국방 장관·총사령관으로서 영국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