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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70 군사연구 제127집 잡더니 괴성을 지르며 같이 돌격해 갔다. 무시무시한 육박전이 벌어졌고 이내 시 내에 진출했던 영국군은 밀림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몇 차례의 공격과 후퇴하는 와중에 영국군은 물을 공급받지 못했다. 영국의 인 도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수통은 비어 있었다. 이에 반해 독일 원주민 아스카리 스들은 충분한 양식과 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영국의 에이트켄 사령관은 다시 공 격을 명령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물을 먹지 못한 영국군 병사들은 지쳐갔다. 오 후 3시까지 600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다. 영국군 병사들이 열을 받아 탈진되면서 늪지에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현대식 모젤 98 소총으로 무장한 독일 저격병들은 영국의 장교들을 쏘아 넘겼 다. 진흙으로 견고하게 밀림과의 경계선에 진지를 쌓고 참호를 판 채 기관총으로 무장한 원주민 부대를 총검으로 뚫는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지친 와중에도 명령 에 따라 공격해 오는 영국군은 독일 기관총 사수들의 밥이 되었다. 접전이 계속되면서 독일군의 탄약이 거의 떨어져 갔다. 이제 독일군도 육박전을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독일군 아스카리스 병사들이 지쳐가는 인도 병사들을 밀 림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자 북 랭커셔 대대의 영국 군인들도 뒤로 밀렸다. 영국군 은 후퇴하면서 야생 벌집들로 가득 찬 덤불을 지났다. 이때 소란에 자극 받은 벌 들이 떼로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벌들은 오늘날 공포 소설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살인 벌들14)’이었다. 벌들은 특히 독특한 냄새가 나는 인도 병사들을 집 중 공격했다. 벌들에 치명타를 맞은 영국군은 쓰러져 갔다. 탕가전투를 ‘벌떼의 전 쟁’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국군은 함포사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포 격마저 독일군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영국 주둔병원막사와 영국군에 떨어졌다. 11월 6일 동이 틀 무렵,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병력은 탕가를 장악했다. 에이 트켄 소장은 정전 협상을 선언한 다음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영국군은 사망자 1,000여 명, 부상자 500여 명, 실종자 500여 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다. 실종자들 은 밀림의 습지에 빠져 죽거나 살인 벌, 맹수에 의해 죽었으리라 추정된다. 독일 군의 손실은 매우 적었다. 67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148명의 사상자만 기록 했을 뿐이다. 독일군은 수백 자루의 소총, 60만 발의 탄약과 그 밖의 엄청난 보급 품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14) 아프리카 살인 벌은 억센 공격력과 침에 강한 독이 있어 많은 사람이 공격을 받고 죽는 경우가 많음. 우간다 정부의 경우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살인 벌을 이용하는 방안을 강 구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함.